문화 낙하산의 지긋지긋한 단순함

2025-02-27

지금 워싱턴 DC의 예술계에서 뜨거운 이슈는 ‘단순함 대 복잡함’의 구도로 읽을 수 있다. 이달 중순 트럼프 대통령이 케네디 센터를 장악했다는 소식이다. 포토맥 강변의 공연장인 케네디 센터는 1971년에 문을 연 이래 최대 논란을 겪고 있다.

우선 문화 낙하산은 단순하다. 친한 사람을 왠지 대단한 전문성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은 문화 분야에 꽂아 넣으면 된다. 이건 한국에서도 익숙하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낙하산은 놀라울 정도로 신선했다. 자기 자신을 이사장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낙하산 중에서도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준 낙하산이었다.

트럼프 이사장 취임 케네디 센터

“보트 시설 만들자” 파격 예고

공연 다양성 줄고 모금 힘들 듯

가디언 ‘소련 예술 통제’ 비교도

트럼프 대통령과 동시에 입성한 측근들의 사고도 단순하다. 릭 그레넬은 케네디 센터의 대표로 임명된 후 비전을 이렇게 밝혔다. “크리스마스에는 크리스마스 행사를 열자.” 그는 또 컨트리 가수 돌리 파튼의 공연도 케네디 센터에 적합할 거라며 이유를 밝혔다. “내가 보고 싶기 때문에.” 역시 지극한 단순함이다.

다른 한쪽에는 복잡함이 있다. 케네디 센터에서 열리는 공연은 클래식·현대음악·오페라·연극·무용 및 다양한 예술이다. 이 공연장의 사명 목록에는 이룩하기도 험난한 ‘문화적 다양성’이 들어있다. 또 공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시민들의 일상에 영감을 주겠다는, 쉽지 않고 복잡한 다짐을 공표하고 있다.

복잡한 철학을 가진 예술 센터는 재무제표도 명쾌하지만은 않다. 케네디 센터는 지난해 2억6800만 달러(약 3841억원) 예산으로 1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사업만 할 수는 없다. 다양한 인종, 성소수자, 소외된 예술 장르의 공연도 무대에 올려왔다. 복잡하고 어려운 운영이다. 이런 복잡한 사명과 운영에는 명쾌하지 않은 것들도 이해해보며 성장하는 인간의 습성이 보인다.

여기에 대비되는 것은 “케네디 센터가 적자이니, 보트 정박 시설을 만들자”는 단순함이다. 이 말은 트럼프 대통령의 친구이자, 모델 매니지먼트사의 대표이며, 2020년부터 케네디 센터의 이사였던 파올로 잠폴리가 했다.

케네디 센터의 외벽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말이 새겨져 있다. “페리클레스의 시대는 페이디아스(조각가)의 시대였다. 엘리자베스의 시대는 셰익스피어의 시대였다. 내가 주장하는 사회의 뉴 프론티어가 미국 예술의 뉴 프론티어가 될 수도 있다.” 사회의 발전과 예술의 발전을 연관 지은 발상인데, 조금이라도 문화 경험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SNS에 이런 문장을 썼다. “이사장이 돼 매우 영광스럽다. 케네디 센터를 매우 특별하고 흥미진진한 곳으로 만들겠다!”

단순함의 효력은 즉각적이다.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케네디 센터의 데보라 러터 대표, 데이비드 루벤스타인 이사장이 단숨에 해고됐다. 루벤스타인은 20년 동안 케네디 센터에 1억2000만 달러(약 1700억원)를 개인 기부했지만 소용없었다.

뉴욕타임스는 19일 기사에서 단순함이 곧 역풍을 맞을 거라 예측했다. 이사장 트럼프의 케네디 센터 기금 모금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쫓겨난 대표와 이사장이 2023년 모금한 기부금은 1억4100만 달러(약 2000억원)였다. 예술 센터에 전념했을 때 이 정도였다. 러터 대표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예술 센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아티스트와 관계, 직원 감독, 기금 모금, 의회 및 백악관과 협력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영국의 가디언은 24일 이 소식을 전하며 소련의 예술 통제를 언급했다. 가히 1930년대를 떠올릴만한 사건이다. 스탈린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난해하고 복잡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년)을 보고 격노했다. 쉽게 이해 가능하고, 진취적인 내용의 작품을 써내라 요구했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5번을 내놨다. 단순한 눈으로 보면 혁명을 찬양하는 음악이다. 하지만 예술의 복잡성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작곡가가 숨겨놓은 수수께끼로 들린다. 순응인 것 같았던 음표는 저항이고, 승리로 들렸던 부분은 공포의 비명이다. 이 음악이 사람들을 지금도 매혹시키는 이유가 바로 혼란스러움이다. 세계의 중심지에서 일어난 ‘예술과의 전쟁’ 소식을 들으며, 언젠가 단순함을 이길 복잡함에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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