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랑 외교, 애국 소비, ‘국뽕’ 영화…붉은 고양이 세상 된 대륙

2024-10-25

[한우덕의 차이나 워치] 중화 권위주의는 중국을 어떻게 바꿨나

#1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에서 일본인 초등학생이 괴한에 습격당해 피살된 건 지난 9월 18일이었다. 만주사변 93주년이 되던 바로 그날이다. 지난 6월 쑤저우(蘇州)에서는 한 중국인 남성이 일본인 어머니와 아이를 겨냥해 흉기를 휘두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 중국은 지난 6월 ‘글로벌 과학기술 강국으로의 부상’ 목표 연도를 2035년으로 정했다. 11년 남았다. 목표 달성을 위해 제시한 첫 번째 방안이 ‘신형거국체제(新型擧國體制)’다.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과학기술 육성에 나서겠다는 뜻이다. 마오쩌둥(毛澤東)시대 대약진운동을 연상케 한다.

#3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시진핑(習近平)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슬쩍 공개한 적이 있다. “그(시진핑)는 한국과 중국의 수천 년 역사를 말했다.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했다. 10분 정도 얘기를 듣고는 ‘쉽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월스트리트 저널, 2017. 4. 17)

일대일로 통해 한·당 시대 영광 재현 꿈

3가지 사례는 발생 시기와 장소가 다르고, 분야도 같지 않다. 그러나 이 사건을 관통하는 하나의 논리가 있다. 바로 ‘중화 권위주의’다. ‘중화 민족주의’와 ‘공산당 권위주의’를 축약한 말이다. 지금 ‘시진핑의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모두 포괄할 키워드인 셈이다.

우선 ‘중화 민족주의’를 보자. 최고 권력자 시진핑은 기회만 있으면 ‘중국몽(中國夢)’을 외친다. ‘중화 민족의 위대했던 역사를 오늘 되살리자’는 얘기다. 그의 대표적인 정책인 ‘일대일로(一帶一路)’에 숨은 코드이기도 하다. 중국이 실크로드를 뚫은 것은 한(漢)나라 때였고, 그 길을 통해 문물이 가장 활발하게 오간 건 당(唐)나라 때였다. ‘강했던 한나라, 융성했던 당나라(强漢盛唐)’의 영광을 오늘 재현하자는 게 일대일로의 취지다. 일대일로는 그렇게 중화주의, 중국몽과 만난다.

중국을 중심에 놓고, 그 주변을 오랑캐로 보는 화이(華夷) 사상은 오늘 중국에 되살아난다. 현재 자국 영토에 있었던 과거의 왕조는 모두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려 한다. ‘동북공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과거 한때 우리가 지배했었어’라는 인식으로 남중국해의 9단선을 그었고(그래픽), 관련국과의 분쟁을 야기하고 있다.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는 시 주석의 인식도 그 맥락이다.

‘공산당 권위주의’를 보자. 이건 다르다. 개혁개방의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과도 다르고,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 등 전임자와도 구별된다. 당시만 해도 공산당 지도부에는 여러 목소리가 존재했고, 정파 간 토론을 통해 정책이 만들어지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진핑 1인 체제다. 그는 당의 ‘핵심’ 지위에 올랐고, ‘시자쥔(習家軍)’으로 표현되는 측근들을 요직을 앉혔다. 언론은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는다. 구글·유튜브 등 서방 인터넷은 끊겼고, CCTV 등을 활용한 디지털 감시망은 더욱 촘촘히 짜이고 있다. 시진핑 시기 정치 권력 속성은 오히려 마오쩌둥 시대와 닮아간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민영기업에도 당 조직이 실핏줄처럼 뻗치고 있다. 당 지령과 최고경영자(CEO)의 업무 지시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 명령 체계가 존재한다. 대형 IT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데이터는 국가에 접근 통로를 열어줘야 한다. 민간 혁신은 위축되고, 대신 정책 혁신이 더 중시된다. 미·중 패권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중국이 강조하는 게 과학기술이다. 당이 전면에 나서 국가 역량을 총집결하는 과학기술 분야 ‘거국체제’를 형성한다.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과 학계가 참여하는 ‘R&D(연구개발) 대오’가 그렇게 형성된다. 오늘의 거국체제가 마오쩌둥 시기와 다른 게 있다면 시장의 기능을 보강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신형(新型)’이라는 말이 붙었다. ‘신형거국체제’를 통해 오는 2035년 과학기술 강국 대열에 진입하겠다는 중국의 목표에는 마오의 그림자가 짙다. 시진핑은 지금 ‘과학기술 대약진운동’을 벌이고 있다.

‘중화 권위주의’는 다양하게 표출된다. 외교에서는 전랑(늑대)외교로, 경제 현장에서는 애국소비로, 문화에서는 ‘국뽕’ 영화로 나타난다. 학교에서는 홍색(공산주의)교육, 애국주의 교육이 강렬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 극단적인 애국주의가 표현된 게 바로 선전시의 일본인 초등학생 피살 사건이다.

부작용도 심하다. 특히 경제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동안 중국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느슨한(연성) 권위주의 정치’와 ‘포용적 경제’ 덕택이다. 지난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꾸준히 민간에 대한 개입을 줄여왔고, 민간의 자율과 혁신을 부추겼다. 글로벌 분업 체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중국 경제를 글로벌 ‘넘버 투’로 올려놓은 핵심이다.

서방과 충돌, 세계 지정학적 구도 흔들어

시진핑 시대 ‘중화 권위주의’가 이 논리를 부정하면서 경제는 주춤하고 있다. 권위주의식 의사 결정은 정책 실패를 키운다. 코로나19 때 실시한 ‘제로 코로나’ 정책은 지금도 중국 경제를 옥죄고 있다. 공동부유 이념이 부동산 업계의 시장 논리를 압도하니 경제 전체가 위기에 빠져든다. IT 플랫폼 기업에 대한 규제의 고삐를 죄니 청년 일자리가 줄어든다.

덩샤오핑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고 했다. 공무원들을 ‘경제 전선’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시진핑 시대 들어 ‘고양이의 색깔’이 중요해졌다. 당에 대한 충성도, 이데올로기 이해도, 청렴성 등이 평가의 중심이다. 덩샤오핑 시기 지방 공무원은 기업들과 자주 만나 애환을 들어주고 지원 방안을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 그랬다가는 부패 관료로 몰리기에 십상이다. 당연히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경제 현장이 잘 돌아갈 리 없다.

‘중화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서방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 2018년 이후 미·중 갈등이 심화한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너무 일찍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벗어난 탓에 스스로 적을 불렀다’는 내부 비판도 나온다. 시진핑의 ‘중화 권위주의’는 그렇게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지정학 구도를 바꾸고 있다.

서방 뉴욕발 금융대란 때 중국은 나홀로 환호, 변곡점 2008년에 무슨 일이

‘시진핑의 중국’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2008년을 주목한다. ‘중화 권위주의’가 그때부터 형성됐다는 분석이다.

중국에서 베이징 올림픽이 열렸던 그해 미국에서는 뉴욕발 금융위기가 터졌다. 빠르게 전파된 위기로 서방 경제는 허덕였다. 그러나 중국은 과감한 내수부양 정책으로 홀로 성장을 누릴 수 있었다. 2010년에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2위 경제 대국으로 등장했다. ‘어, 미국 별거 아니네~!’ 올림픽 개최로 한껏 자부심이 높아진 중국인들은 환호했다.

덩샤오핑은 “100년 동안 빛을 감추어라”고 했지만, 시진핑이 집권했던 2013년의 중국 분위기는 달랐다. “이제 우리도 할 말은 해야겠다.” 중국은 미국에 대해 ‘노(no)’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억눌렸던 ‘서방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는 야욕적 충동이다.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이 그 맥락에서 나왔고, ‘중화 민족주의’가 대두하기에 이른다.

당시 중국은 분열되고 있었다. 급격한 시장화로 인한 빈부격차는 동서를 갈랐고, 연안 도시에서도 소득 불균형은 갈수록 심화했다. 관리의 부정부패로 당과 인민의 거리도 넓어졌다. 그런데도 중앙 정계에서는 ‘상하이방’, ‘태자당’ 등 파벌 투쟁이 심했다. 시진핑은 이를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기민함을 보여줬다. 대대적인 반부패 투쟁이 그의 선택이다.

시 주석이 쥔 부패의 칼은 ‘큰 호랑이, 작은 파리’를 가리지 않았다. 모두 잡아넣었다. 수백만 명의 부패 공무원들이 쫓겨날 때 중국 일반 국민은 환호했다. ‘시다다(習大大·시 아저씨)’라는 애칭이 그때 나왔다. 시 주석은 사정 작업을 통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몰아냈고, 인민들의 지지 속에 정치 권력은 다시 1인에게 몰리게 된다. 시진핑을 핵심으로 한 ‘공산당 권위주의’는 그렇게 형성됐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