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웨이터 50년

당신이 먹는 것을 말해 달라. 그럼 당신이 누군지 설명해 주겠다.
미식의 아버지, 장 앙텔름 브리야-사바랭(1755~1826)이 남겼다는 말입니다. 격동의 구한말 조선에서도 이 말은 유효했습니다. 고종이 양식을 먹었던 이유를 알면 그가 가졌던 두려움의 깊이와 압박의 밀도를 가늠할 수 있으니까요. 고종은 누군가 자신이 먹고 마시는 것에 독약을 탈지 모른다는 걱정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아예 자신이 신뢰한 외국인 외교관들을 통해 음식을 먹게 됐죠. 러시아 외교관의 부인과 가족이 마련한 음식은 당연히 양식이었고요.

그렇게 철궤에 자물쇠까지 채워 온 양식은 고종의 배고픔뿐 아니라 괴로움도 달래줍니다. 고종이 차츰 양식에 빠지면서, 양식 문화는 민초들의 삶에도 스며듭니다. 미식 연구의 대가 쓰지 요시키(辻芳樹) 일본 쓰지요리학교 교장은 과거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식의 문화는 톱다운(top down,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방식으로 발전한다”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생존이 아닌 문화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이들이 미식을 발전시키면 그것이 점차 많은 이에게 퍼져나간다는 것이지요.
이는 구한말에도 통하는 말이었습니다. 고종의 양식 사랑은 곧 궁궐 담 밖으로 퍼졌고, 시대의 엘리트 역시 양식을 접하고 사랑하게 되죠. 한국 최초의 웨이터 이중일씨가 생생하게 전하는 구한말의 양식 이야기는 곧 그 시대의 거울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다양한 관련 서적과 사료를 참고했고, 보완해 추가한 내용은 파란색으로 표시했습니다. 참고문헌 목록은 기사 끝에 적시했습니다.
그 옛날, 무성영화 변사의 목소리처럼 AI로 생성한 오디오로도 기사를 ‘들으실’ 수도 있어요. 기사 중간에 있는 오디오 버튼을 살짝 눌러 주세요. 이중일씨의 이야기는 매주 월요일 찾아옵니다.
모던 경성 웨이터 50년⑥ 경성에 불어온 ‘양요리’ 바람
중앙일보 1971년 3월 4일자
궁궐에서 유행한 것이 프랑스 풍의 정통 궁중 양식이었다면, 민간은 달랐다. 민간에선 조금 더 간편한 미국 풍의 양식이 퍼졌다. 이 대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좌옹(佐翁) 윤치호 선생이다. 윤치호는 1885년 초대 주한 미국공사 루시어스 H 푸트(Lucius H. Foote)와 주상해(샹하이, 上海) 총영사 스탈(G. Stahl)의 주선으로 중국 샹하이에 있는 미션스쿨, 중서서원(中西書院)을 졸업했다.
최초 일본 유학생으로 개화파였던 그의 샹하이 행은 망명에 가까웠다. 그와 친분이 깊었던 개화파 인사들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공모자로 몰렸기 때문이다. 이 학교에서 3년 반을 지내면서 그는 초기엔 절망의 시간을 보내며 술과 방탕함에 빠졌다. 그러다 종교에 귀의하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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