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빅맥지수’가 사상 최저치까지 떨어졌다.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의 저평가 정도가 전례 없이 심하다는 의미다.
3일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한국의 빅맥 가격은 약 3.84달러를 기록했다. 햄버거 브랜드 맥도날드가 한국에서 판매 중인 빅맥의 단품 가격 5500원에 미국 달러당 1431.2원인 당시 환율을 적용해 달러화로 나타낸 수치다. 기준 국가인 미국의 빅맥 가격(5.79달러)과 비교해 66.4% 수준이다. 빅맥지수로 0.664다.
동일한 상품은 어떤 시장에서든 가격이 같다는 경제학 이론 ‘일물일가(一物一價)의 법칙’에 따르면 빅맥은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같은 가치여야 하는데, 한국에서 33.6% 싸다는 이야기다. 만일 원·달러 환율이 949.91원이라면 한·미 빅맥이 같은 값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환율이 1431.2원으로 높은(원화 가치는 낮은) 탓에 두 국가 간 빅맥 가격에 차이가 벌어졌다. 이를 두고 이코노미스트는 “원화 가치가 미 달러화보다 33.6% 저평가됐다”고 해석했다.
앞서 한국 빅맥지수는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2000년 4월 1.209(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 20.9% 고평가)였다. 해당 통계는 2008년 6월까지 1보다 소폭으로 높거나 낮은 수준을 이어가다 2009년 7월 0.754로 급락했다. 이후 0.8 안팎을 오르내리다 2022년 7월 0.68로 급격히 떨어졌다. 그러다 올해 1월 0.664까지 내려온 것이다.
한국 빅맥지수를 끌어내린 주요 원인은 ‘강달러 현상’인 것으로 분석(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된다. 특히 2009년 7월엔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향이 강달러를 부채질했다. 2022년 7월엔 미국이 기준금리 인상 흐름을 탄 영향이 컸다. 올해 1월엔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출범하며 달러화 가치를 끌어올렸다. 강달러와 더불어 지난해 12월부터 한국 내 정국 불안이 조성되면서 원화 가치를 끌어내린 결과 한국 빅맥지수가 역대 최저치를 찍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16일 기자 간담회에서 “미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가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에 비해 많이 내려갔다. 계엄이나 정치적인 이유로는 30원 정도 떨어졌다”는 뜻을 밝혔다.
원화 가치가 과도하게 떨어지면 수입 물가를 올려 내수 경기에 악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또한 한은이 경기 부양 목적으로 기준금리를 내리고 싶어도 원화 가치 하락을 부추길 위험 탓에 주저하게 만드는 단점이 있다. 일부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일 수 있지만, 갈수록 가격보다는 기술력을 강점으로 삼는 수출 기업이 늘고 있어 낮은 원화 가치의 이점은 쪼그라드는 추세다.
한국은 이웃 국가인 일본보다는 상황이 양호하다. 지난 1월 일본 빅맥지수는 0.537로 한국보다 낮은 수준을 나타냈다. 엔화 가치가 미국 달러화보다 46.3% 저평가됐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엔저 현상’이 있다. 일본의 기준금리가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낮은 수준(0.5%)을 나타낸 영향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초저금리인 엔화를 빌려 금리가 높은 다른 국가의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여전한 점, 지난해까지 4년 연속 일본이 무역적자를 본 점 등도 엔화 약세를 부추겼다.
물론 빅맥지수만으로 특정 통화의 고평가·저평가 수준을 정확히 판단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국가마다 점포 임대료, 직원 임금, 세금 등이 달라 빅맥지수의 이론적 뿌리인 일물일가 법칙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결제은행(BIS)이 집계하는 실질실효환율 지수를 봐도 원화와 엔화의 저평가 현상이 두드러진다. 지난해 12월 말 한국의 실질실효환율은 91.03(2020년=100)으로 집계 대상인 64개국 가운데 일본(71.3) 다음으로 낮았다. 해당 수치가 100 밑이면 주요 교역 상대국의 통화 대비 저평가됐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