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 기억과 상상 시간의 본질을 묻다

2024-10-17

노벨문학상 후보로 꾸준히 지명

베게트의 계승자로 평가 받는 작가

광활함 속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담아

“한 사람을 타인과 구별짓는 건 그가 마침내 자신을 발견한 풍경”

평원 |

제럴드 머네인 지음 |박찬원 옮김 |은행나무 |1만6800원

“나는 어떤 사건이나 성취가 거의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타지인이었다면 시답지 않게 여겼겠지만 평원 주민은 이해했다. 평원의 소설가와 극작가와 시인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느껴질 종류의 이야기였다. 평원의 독자와 청중은 감정의 분출이나 격렬한 갈등 혹은 갑작스러운 재난을 인상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그런 것을 표현하는 예술가는 평원 저 너머 세상의 압축된 풍경에서 보이는 넘쳐나는 형태와 표피 혹은 군중의 소음에 미혹되어서라고 생각한다.”

제럴드 머네인(85)의 소설 <평원>은 독특하다. 마치 작중 화자의 말처럼 “어떤 사건이나 성취가 거의 없는 이야기”처럼 읽힌다. 작품은 전통적 서사, 플롯, 캐릭터 등에서 벗어나 내면과 풍경, 예술의 본질, 장소와 시간, 상상과 기억에 대해 대해 탐구한다. 특정 줄거리보다는 철학적인 사색, 서정적인 묘사와 이미지, 분위기에 집중한다.

작가 제럴드 머네인은 10년 넘게 꾸준히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어 온 호주 작가다. 사무엘 베케트의 계승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는 프루스트, 카프카 등과도 비견된다. <평원>은 1982년 발표된 그의 대표작으로, 그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국내에 번역·출간됐다.

소설은 한 젊은 영화 제작자가 20년 전 <내륙>이라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호주 내륙의 머나먼 평원에서 머물렀던 경험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소설의 화자는 ‘외곽 호주’(호주 대륙 해안가 지역)를 떠나 ‘내륙 평원’의 한 마을에 도착한다.

이 평원에서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는 부유한 지주 가문들은 광활한 영지에서 풍요롭고 독특한 자신들만의 문화를 보존해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땅에 집착하면서 예술가들이나 역사가들을 후원하는 형식으로 그들 삶의 모든 상세한 측면과 자연을 세밀하게 기록해왔다. 출판업자, 디자이너, 화가, 종교인 등이 부유한 지주들로부터 후원을 받기 위해 그 곳에 모여 들었고, 화자 또한 자신의 영화를 후원해 줄 대지주를 찾아 나선다. 화자는 한 지주의 후원을 받게 되고 그 지주의 대저택에 머물면서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영화 대본을 위한 무수한 메모를 하고 후원자의 딸을 영화 주연으로 발탁한다.

이 작품에서 ‘평원’은 단순한 공간적 배경에 그치지 않고 자연·역사·삶 등이 어우러진 압도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평원은 끝없이 펼쳐진, 경계가 보이지 않는 무한한 공간으로 그려지는데, 화자는 이러한 평원의 무한함과 고요함에 그 자체로 압도당하며 경외와 함께 평원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런 날들에 내가 마주했던 평원은 끝도 없이 다 똑같지는 않았다…또 때로는 전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드넓은 시골 저 끝에서, 언덕임에 분명한 것을 향해 도로가 오기도 했고, 그러고 나면 앞에서 또 다른 평원이 평평하고 헐벗고 압도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평원에서는 시간 또한 끝없이 펼쳐진 평원의 풍경처럼 느리고 고요하게 흘러간다. 이 책의 두 번째 장인 ‘둘’에서는 평원의 ‘시간’에 대한 철학적 사색이 담겨 있다. 평원의 시간은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기억과 상상이 뒤섞인 추상적인 개념으로 묘사되면서 독자로 하여금 시간의 본질을 사유하게 한다.

“나의 오랜 독서뿐 아니라 평원인과의 긴 대화를 통해서 이 곳 사람들은 일생을 일종의 또 다른 평원으로 이해한다는 확신을 얻는다. 이들은 오랜 세월에 걸친 여정이니 하는 진부한 표현은 좋아하지 않는다.”

“‘시간’이란 두 사람만 모여도 그 의미에 합의할 수 없고, ‘시간’에 대해선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으며, ‘시간’에 관한 우리의 모든 언급은 이 평원의 엄청난 공허함과 평원 너머로 여행하게 해줄 유일한 차원에 대한 기억의 부재를 채우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주인공은 ‘평원’을 영화로 담아내려는 목표로 평원에 머물지만, 어느덧 그 목표마저 추상적으로 흐릿해져간다. “영화 제작자인 나는 이 풍경을 탐색하고 다른 이에게 드러낼 자격을 훌륭하게 갖춘 사람”이라고 자부하던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평원의 규모, 깊이, 한계를 온전히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평선을 거의 보기 힘든 영토에서 최첨단 문명의 빠른 속도에 익숙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작품이 주는 시·공간감은 낯설고 생경하다. 그렇지만 광활한 자연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작가의 문장들을 따라가다보면 어느덧 낯선 시·공간에 공명하게 된다. 작품 속 화자는 말한다. “풍경을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결국 한 사람을 타인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그가 마침내 자신을 발견한 풍경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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