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CEO, 삼성 HBM3E에 "새로 설계해야"
'유의미한 진전' 기대했으나 단기 내 퀄테스트 통과 '희박'
삼성, HBM3E 재설계 대신 HBM4 속도전 승부수 가능성
삼성전자의 엔비디아향 HBM3E(5세대 HBM, 고대역폭메모리) 공급 소식을 올해 들어볼 수 있을까. 젠슨 황 엔비디아 CEO(최고경영자) 발언을 보면 단기 내 이뤄질 가능성은 낮다. 그는 "삼성전자는 HBM3E를 새로 설계해야 한다"며 퀄(품질) 테스트가 아직 진행중임을 언급함과 동시에 통과를 전제로 한 과제도 함께 제시했다.
HBM3E로 가는 길이 더딘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자존심 회복을 위한 '묘수'를 고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설계를 뜯어고치는 일은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여서 이 단계를 건너뛰는 대신 HBM4(6세대 HBM) 완성도를 높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달 31일 예정인 실적설명회에서 삼성전자가 구체적인 해법을 내놓을지 관심이다.
9일 업계에 따르면 젠슨 황 CEO는 7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열린 'CES 2025' 기자간담회에서 삼성의 HBM과 관련해 "현재 테스트 중이며,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면서 "새로운 설계를 해야 하고(they have to engineer a new design),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원래 엔비디아가 사용한 첫 HBM 메모리는 삼성이 만든 것이었다"며 "그들은 회복할 것(recover)"이라는 희망적 메시지도 전했다.
삼성 HBM의 '성공'과 '회복'을 언급했지만 결정적으로 '새로운 설계'를 주문한 것은 삼성이 엔비디아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려면 아직도 가야할 길이 있음을 시사한다.
언뜻보면 엔비디아의 요구가 가혹한 것 같지만 AI 가속기 완성도를 높이는 데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점을 감안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부품 결함은 고스란히 4만 달러(5800만원, 블랙웰 기준)어치의 AI 가속기 비용손실로 이어진다.
엔비디아는 이 블랙웰 개발을 위해 100억 달러(14조원) 규모의 연구비를 쏟은 것으로 알려졌다. 안정적인 AI 가속기 공급을 위해 엔비디아가 톱 티어 제조사에 집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0개월 넘게 엔비디아향 HBM3E 퀄테스트를 진행중인 삼성전자로는 이같은 엔비디아의 주문이 곤혹스러울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은 지난해 10월 말 가진 4분기 실적설명회에서 엔비디아향 HBM3E 공급 가능성을 언급하며 시장 기대감을 끌어올린 바 있다.
당시 회사측은 "예상 대비 주요 고객사향 사업이 지연됐으나 퀄 과정상 중요한 단계를 완료하는 등 유의미한 진전이 있었다"고 말해 4분기 중 판매 확대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1월 현재 엔비디아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데다 추가 과제도 떠안은 것이 현실이다.
이는 일찌감치 엔비디아향 HBM 공급에 성공한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엔비디아의 우선 공급자로 지위를 확보한 것과 대조적이다. SK하이닉스는 'CES 2025' 기간 5세대 HBM(HBM3E) 16단 제품 샘플을 선보이며 기술 우위를 과시했다.
이 제품은 어드밴스드(Advanced) MR-MUF 공정을 적용해 업계 최고층인 16단을 구현하면서도 칩의 휨 현상을 제어하고 방열 성능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올해에도 엔비디아향 HBM 최대 공급자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대목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이 같은 전망에 힘을 실었다. 그는 8일(현지시간) 기자간담회에서 SK하이닉스의 HBM 개발 속도가 엔비디아 요구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젠슨 황 CEO와 만나 "사업 관련 여러 논의를 했다"면서 추가적인 비즈니스 협업 가능성을 시사했다.
마이크론도 HBM3E 기술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마이크론은 지난달 가진 실적 설명회에서 자사의 HBM3E 8단이 엔비디아 블랙웰 B200 및 GB200 플랫폼에 맞게 설계됐다고 밝히며 HBM3E 12단에 대해서도 고객들의 긍정적인 피드백이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경쟁사에 우선순위를 내어주게 된 삼성으로서는 엔비디아향 HBM 공급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한다. 해당 제품 퀄테스트가 해를 넘겨 진행되면서 삼성 메모리 기술에 대한 업계의 의구심이 커졌다. 기술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지 못하면 오랜기간 쌓아올린 기술 평판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다.
실제 삼성전자의 DS(반도체) 부문 실적은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전날 발표한 삼성전자 4분기 영업이익 6조5000억원 중 DS 부문은 2조원 후반대로 추정된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시스템LSI(반도체 설계) 조 단위 적자에 기인한 것이 크지만 이를 감안해 계산하더라도 메모리 사업부 영업이익은 5조원 초반대다. 같은 기간 SK하이닉스 전망치인 8조원과 격차가 크다.
유진투자증권은 "삼성에게 지금 더 급한 것은 본진인 메모리 근본 경쟁력 회복"이라며 "향후 변수는 메모리에서 선두와의 격차를 어떻게 좁히느냐 여부"라고 지적했다. 이어 "전 임직원이 단결해 뼈를 갈아넣는 심정으로 분발하지 않으면 과거와 같은 강한 삼성은 재현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삼성은 HBM 로드맵 전략을 고심할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엔비디아가 요청한대로 HBM3E 설계를 다시 짜 퀄테스트를 받거나, 아예 5세대를 건너 뛰고 6세대 HBM(HBM4)에서 새롭게 승부를 보는 방식 등이다.
AI 서버 시장 내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을 엔비디아 AI 가속기 '블랙웰'에는 HBM3E이 탑재돼 삼성으로는 놓칠 수 없는 호재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는올해 전체 서버 산업 가치가 4133억 달러이며 이중 AI 서버 비중은 72.0%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를 환산하면 2975억7600만 달러(433조6872억원)다.
트렌드포스는 "3분기 전후 B300 및 GB300 솔루션이 출시되면 HGX 및 GB 랙 시리즈와 같은 블랙웰 기반 제품 출하량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시장성이 아무리 좋아도 HBM3E 설계를 변경하는 것은 비용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부담이 크다. 설계를 바꾸려면 GPU(그래픽처리장치)와 연결돼 HBM을 컨트롤하는 베이스 다이도 수정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베이스 다이는 HBM 맨 아래 탑재되는 핵심 부품으로 '로직 다이' 또는 '버퍼 다이'라고도 불린다. 한시가 급한 삼성전자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실제 반도체 제조사에게 있어 제품 출시 소요 기간(Time to Market)을 줄이는 것은 중요한 경쟁력으로 여겨진다.
팹 공정→웨이퍼 테스트&인증→스택→KGSD 테스트&인증→OSAT(반도체 패키지 테스트, SiP 빌드)→SLT(시스템 레벨 테스트) with SiP&인증→고객 평가 과정까지 HBM이 통상 5개월 걸린다고 가정할 경우, 문제가 생겨 절차를 다시 밟게 되면 기간은 1년으로 늘어난다. 고객사나 제조사나 부담이 커진다. 자칫 HBM3E 개발 중에 HBM 패러다임이 HBM4로 넘어가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삼성은 6세대 HBM으로 직행하는 승부수를 던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삼성은 올 하반기를 목표로 HBM4 개발을 진행중이다. 이를 위해 삼성은 10나노급 6세대(1c) D램을 적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10나노급 D램은 1x(1세대)-1y(2세대)-1z(3세대)-1a(4세대)-1b(5세대) 순으로 개발됐으며 1c가 가장 최선단 공정이다.
더욱이 삼성은 베이스 다이 제조 관련 파트너 선정은 고객 요구를 우선으로 한다는 방침이어서 자사 파운드리가 아닌 TSMC와 손잡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차세대 HBM 성공을 위해 삼성전자가 사활을 걸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6세대 HBM에서 확실한 획을 그어야만 삼성 반도체 위상을 되찾아올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도 해석된다.
삼성 HBM을 엔비디아에만 국한해서는 안된다는 관측도 있다. ASIC(주문형 반도체) 강자로 떠오른 브로드컴을 비롯해 빅테크들의 삼성 HBM 수요가 이어지면서 수익성 개선이 예상된다는 전망에서다.
키움증권은 "HBM은 브로드컴과 아마존 등 ASIC 고객들로부터의 판매 확대가 지속되며 D램의 블렌디드 ASP(평균판매단가) 상승과 수익성 개선을 이끌 전망"이라고 했다.
HBM3E 재설계든, HBM4 속도전이든 삼성전자는 지속되는 반도체업계의 의문에 답을 내놔야 한다. 오는 31일로 예정된 실적설명회에서 메모리 반도체 로드맵 및 고객사 전략 등에 대한 설명을 구체화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