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상생금융을 준비하던 금융당국 인사가 전해준 일화다. 은행에 협조를 요청할 금액을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회의 직전 숫자를 1.5배 올렸다. 마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협상 금액을 현장에서 고치듯이 말이다. 은행들은 초안의 숫자를 몰랐겠지만 ‘1.5배’ 올라간 금액으로 사업이 진행됐다. 담당자는 ‘아차’ 싶었다고 했다. “2배로 올릴 걸 그랬습니다.” ‘관치금융’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금융감독원장에 이재명 대통령의 ‘절친’이 왔다. 이찬진 금감원장 선임은 지난 13일 갑자기 발표됐다. 발표 당일 금감원 회의 석상에선 “누구냐”며 술렁였다. 취임 일주일 지난 지금도 금융권 CEO들이 모인 자리에선 서로 묻기 바쁘다고 한다. “이찬진이 누구인가?” 자신이 아는 ‘이찬진’은 한글과컴퓨터 사장뿐이라는 말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알려진 건 대통령에게 ‘5억원’을 빌려준 사람이라는 점뿐이다. 이렇다보니 ‘5억원 원장’이라는 별명마저 붙었다.
그는 분명 ‘실세’다. 그는 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18기 동기이며 이 대통령의 대북송금 의혹 사건과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등의 변호인이었다. 친분의 정점은 채무관계로 보여준다. 이 원장은 과거 이 대통령에게 5억원을 빌려줬다. 이 대통령의 2019년 공직자 재산신고 내용이다. 근저당권도 대통령 분당 집 값의 140%인 7억원으로 잡았다. 5억원이라는 거액을 떡하니 빌려줄 정도라면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사이다. ‘관치금융’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국 금융권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논란이 유발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 대통령이 논란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임명했다. 금융권에 대통령의 뜻이 왜곡되어 전달되지 않도록 ‘직접’ 소통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원장은 대통령이 보낸 금융권의 ‘군기반장’이다.
‘실세 군기반장’ 효과는 즉각 발휘되고 있다. 금융권은 바짝 긴장했다. 금감원이 기업 회계감독과 공시 업무까지 맡는다는 점에서 일반 기업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단순히 실세여서 긴장감이 커지는 건 아니다. 이 원장은 금융 이력이 전무하다. 그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부회장과 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을 맡아온 법조계·시민단체 인사다. 박정희 정권 당시 구로공단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농지를 빼앗긴 농민의 유족을 대리하면서 국가 배상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법조계에선 출중한 인사일지 몰라도 금융권 이력은 없다. 그는 취임 전날까지 국정기획위원회의 보건·의료 관련 사회분과위원장이었다.
그나마 금융과 접점이라고 내밀 수 있는 이력은 2018~2022년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 활동이다. 참여연대 추천 위원이었다. 당시 기금운용본부 회의록을 보면, 이 원장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에 큰 목소리를 냈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인 스튜어드십 코드를 만들 때 집요하게 캐물었다. 다른 목소리도 냈다. 가습기 살균제 사고를 일으킨 옥시와 같은 기업에 국민연금이 투자하면 안 된다고 했다. 기업이 장기적으로 건전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했다. 회의록의 발언들은 합리적이라고 느껴졌다.
금융 경력이 있다고 해서 금융감독을 다 잘하는 건 아니다. 역대 금감원장 15명 중 11명이 관료 출신이었다. 경제 쪽 인사가 지금까지 금융감독을 잘해왔다고 볼 순 없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신선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과거 금융권 인연 때문에 특정 회사를 ‘눈감아줄’ 우려도 낮을 테다. 금융을 모른다는 점은 의외의 장점일 수 있지만 치명적 단점일 수 있다.
의외의 장점과 치명적 단점을 가르는 건 이 원장 본인이다. 그의 취임사에서 ‘이찬진표’라고 밑줄 그을 만한 언사를 찾기는 힘들었다. 지금은 조용히 ‘듣고 공부’하는 모양새다. 귀를 열고 새로운 걸 알아나가야 하겠지만 ‘듣기만 하고 공부만 하는’ 시간이 길어져선 안 된다.
이른 시일 안에 ‘이찬진표’ 금감원장의 색깔을 드러내야 한다. 금감원장으로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깃발을 흔들어야 한다. 그래야 금융권도 발을 맞출 수 있다. 뒷짐만 지고 있으면 금융권도 조용히 하던 대로만 한다. 시장이 가장 싫어하는 건 불확실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