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어쩔수가없다'는 현실을 넘어

2025-12-02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가 누적 관객 300만에 달한다. 필자 또한 그 중 한 사람인데, 띄어쓰기 하나에도 집요하게 매달리며 의도를 담는 감독인 만큼 이번 작품 역시 플롯과 시퀀스를 해부하듯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영화 속 서사를 따라가며 여러 해석이 떠올랐지만 가장 큰 여운으로 남은 것은 그 구조가 필자가 몸담은 금융 산업, 그 중에서도 신용사회의 작동 원리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는 점이다.

영화 속 주인공 만수(이병헌)와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경쟁자들 모두는 '종이를 만드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인지적 프레임(Cognitive Frame)'안에 갇혀있다.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해석된 사실을 본다'는 인지적 프레임 이론의 핵심 명제가 그들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인물들이 내뱉는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체념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는 인식의 감옥에서 비롯된 언어다.

이 닫힌 인식의 구조는 전통적인 신용평가 시스템과 닮아 있다. 개인의 가능성을 직업의 범주로 제한하는 영화 속 세계는 신뢰를 과거 데이터로 환원해 점수라는 숫자로만 해석하는 신용사회의 프레임과 맞닿아 있다.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영화 속 인물들은 새로운 신용평가의 형태와 가능성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전통적 신용평가 제도와 겹쳐 보인다. 결국 점수가 낮으니 '어쩔수가없다'는 평가는 다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믿음의 구조를 드러낸다.

영화 속 인물들이 종이 밖에 모르는 삶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하듯, 신용평가 또한 신용을 새롭게 정의하고 측정하는 방식으로 진보해야 한다. 과거의 데이터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지표를 통해 앞으로의 가능성을 포착하는 방향으로 프레임이 전환돼야 하는 셈이다.

다행히도 영화와 달리 우리의 현실은 낙관적이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 분석 기술의 발전은 신용의 경계를 확장하며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국내 핀테크 기업들이 주도하는 AI 금융 기술이 차세대 신용평가 인프라로 자리 내리고 있으며, 이를 통해 고금리로 내몰리는 것이 어쩔 수가 없었던 수많은 중저신용자들에게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필자가 속한 회사는 AI 신용평가 체계 하에 저축은행 자금을 조달해 최근 5개월간 979건의 중금리 대출을 일으켰고, 그 평균 신용점수는 700점대로 나타난다. 전통적인 신용점수 체계에서는 위험군으로 분류될 수 있었음에도 연체는 단 2건에 불과하다. 이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이들의 상환 능력과 신뢰의 가능성을 새롭게 읽어낼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데이터와 AI 기술은 더 이상 신용사회의 한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대출이 거절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고금리를 감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종래의 고정된 현실을 뒤흔들며 다른 선택이, 더 나은 선택이 가능한 신용사회를 그려가고 있다. AI 리스크 관리 시스템이 신용사회의 새로운 프레임이 되는 미래, 그리고 그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또한 '어쩔수가없다'고 진심으로 바래본다.

이수환 피에프씨테크놀로지스(PFCT) 대표 soohwan@pfc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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