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지난 15일 ‘비전 프로’를 국내에 공식 출시했다. AR(증강현실)·VR(가상현실)·MR(혼합현실)이라는 익숙한 표현 대신 ‘공간 컴퓨팅’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들고 나왔다. PC·스마트폰에 이어 완전히 새로운 컴퓨팅 플랫폼을 보급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다. 애플의 공간 컴퓨터는 어떤 성적을 낼까. 비전 프로를 애플코리아로부터 대여해 약 3주 동안 체험해봤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미국에서 정식 출시(2월 2일)한 지 9개월이나 지나 국내에 상륙했다.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뒀다 말하기 어렵다. 외신에서는 애플이 글로벌 시장 판매 부진으로 인해 비전 프로 생산량을 줄이고 있으며, 이르면 연내 생산을 중단할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한국 시장 출시를 두고 일각에서는 “재고처리 아니냐”는 비아냥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단점
역시 비싼 가격은 가장 큰 진입장벽이다. 국내 출시가는 499만원부터 시작한다. 일반 사진·비디오보다 훨씬 큰 용량을 요구하는 공간 사진·비디오의 특성을 감안하면 1TB는 사실상 필수적인 옵션으로 보인다. 이 경우 가격은 559만원까지 치솟는다. 조금만 움직여도 걸리적거리는 연결선과 최대 2시간도 버티지 못하면서 무겁기만 한 배터리 팩은 아직 애플이 말하는 공간 컴퓨팅 시대까지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절감케 한다. 착용 후 1시간이 지나면 피로감을 느끼거나, 경우에 따라 어지러움을 느끼는 일도 문제다. 이에 대해 애플 역시 “특정 경험으로 인해 소수의 사람들이 멀미를 경험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IT기기에서 체험할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지만 몰입감 측면에서 메타 퀘스트 등 기존 제품과는 차원이 다른 공간감을 제공했다. 눈앞에 펼쳐진 가상 디스플레이를 손으로 터치하거나 음성으로 조작할 수 있는데, 인터페이스와 사용자 경험에 집요할 정도로 집착하는 애플인 만큼 기대 이상의 반응성과 정확도를 보였다.
IT기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첫 사용 후 1시간 안에 방 안에 누워 천장에는 유튜브, 다른 쪽 벽면에는 웹 브라우저, 바닥에는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띄워두고 작업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을 정도다. 비전 프로의 대부분 기능은 아이폰·아이패드·맥북과 동시에 연결 가능하다.
공간 컴퓨팅의 첫 세대 제품인 만큼, 애플은 가격을 생각하지 않고 고성능 전자 부품을 아낌없이 넣었다. 전용 애플실리콘이 탑재된 듀얼 칩 디자인으로 맥북·아이패드에도 탑재되는 M2 칩은 전반적인 컴퓨팅 성능을, R1 칩은 실시간 센서 처리를 담당한다. 12개의 카메라와 다양한 센서는 사용자의 동작과 주변 환경을 인식한다. 애플은 사용자 움직임과 기기 반응 사이 시차를 최소화하기 위해 SK하이닉스에 별도의 고성능 메모리 칩을 주문했다.
‘애플스러운’ 제품
1983년 스티브 잡스는 한 행사에 참석해 애플의 목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애플의 전략은 매우 간단합니다. 고성능의 컴퓨터를 공책 정도의 사이즈로 만드는 거에요. 지금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하죠.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냥 포기하는 것. 두 번째는 경쟁사들이 하는 것처럼 쓰레기 같은 성능의 컴퓨터를 공책 만하게 만드는 것. 세 번째는 우리의 목표대로 단계를 밟아가며 컴퓨터를 만드는 겁니다. 현재 우리 기술력으로는 빵 상자 만한 컴퓨터를 1만 달러의 가격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만들고 있는 ‘리사’ 컴퓨터죠. 그 다음에는 신발상자 만한 크기로 2500달러짜리 컴퓨터를 만들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공책 만한 컴퓨터를 만들어 1000달러 미만으로 팔 겁니다.”
이후 애플이 내놓은 컴퓨터 리사는 비싼 가격과 난해한 사용성으로 상업적으로 대실패한다. 2년 뒤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났고, 애플이 공책 만한 컴퓨터를 만들어 1000달러 미만으로 팔기까지 잡스의 발언 후 23년(2006년 맥북 출시)이 걸렸다.
애플이 이제 막 개척을 시작한 공간 컴퓨팅이 PC나 스마트폰처럼 성공적인 미래가 될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이르다. 애플이 꿈꾸던 공간 컴퓨팅의 시대가 언젠가 온다 해도 그 주인공이 반드시 애플이라는 보장은 없다. 다만 40년 전 잡스가 그랬듯, 성공 가능성이 당장 보이지 않을지라도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 나선 애플이 오랜만에 ‘애플스러운’ 제품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