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플리트 장군과 순직한 파일럿 아들

2024-09-18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참전함으로써 베트남처럼 통일의 감격을 맛보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다는 좌파들이 보면 악다구니를 할 일이지만, 나는 제임스 밴플리트(1892~1992) 장군에게 고마운 마음이 깊다. 이름이 네덜란드 이민의 후손으로 보인다. 그 참혹한 전쟁에서 무고하게 죽은 양민이 왜 없겠는가만, 그것은 시대의 아픔이지 그가 전적으로 책임질 일은 아니다.

밴플리트는 미국 뉴저지 출신이지만 플로리다에서 살았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양차 대전에 참전했다. 동명이인의 술주정뱅이로 오해받아 조지 마셜 참모총장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진급이 늦어졌다. 2차 대전 종전에 따른 군비 축소로 말미암아 소장에서 준장으로 강등되는 아픔에도 불평 없이 군무에 전념했다.

1951년 주한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자마자 조종사였던 아들 제임스가 B-26을 몰고 출격했다가 황해도 해주 상공에서 격추돼 사망하는 참척(慘慽)의 아픔을 겪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부하들이 시체 수색을 건의하자 “그보다 더 급한 일이 많다”며 거부했다. 한국전쟁에서 죽은 장군의 아들이 200명이었으니 그만의 슬픔은 아니었겠지만, 외아들을 잃은 슬픔은 당사자만이 알 일이다.

1953년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떠나던 날 고별식에서 “나는 한국에 내 심장을 남기고 갑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방한한 그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명구를 남겼다. 1953년 그의 퇴역식에 참석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위대한 장군(great general)이란 모름지기 이런 분”이라고 칭송했다.

1992년 100세 생일을 6개월 앞두고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 그를 기념하는 ‘밴플리트 상’을 만들고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공자께서는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인(仁)”이라 했다. 인천 상륙작전 74주년을 맞아 문득 그가 생각난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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