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이허구 무슨 원수가 졌다구 요렇게두 내게다 핍박을 하느냐? 이 악착스런 놈들아!…… 아무 죄두 없구, 아무두 건디리잖구 바스락 소리두 없이 살아가는 나를, 어쩌면 느이가 요렇게두 야숙스럽게…… 아이구우 이 몹쓸 놈들아!”
악을 쓰며 목놓아 우는 이의 이름은 정초봉. 그는 스물한 살에 돈에 눈먼 아버지 때문에 팔려가듯 사기꾼에게 시집을 갔다. 결혼한 지 열흘을 겨우 넘겨 고리대금업자의 농간으로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초봉은 자신을 차지하겠다며 싸우는 두 남자에게 저주하듯 소리 지른다. 한 명은 딸뻘인 초봉을 첩으로 들이겠다는 약국 주인 박제호, 나머지 하나는 고리대금업자인 곱추 장형보다.
몰락한 양반 가문의 장녀 초봉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식민지 시대의 어두운 현실을 그린 채만식(1902~1950)의 장편 『탁류』 초판본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한국문학관이 법인 설립 5주년을 맞아 지난 9월 28일부터 이달 24일까지 청와대 춘추관에서 선보이는 '한국문학의 맥박' 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2021년 문학관의 발굴로 존재가 처음 드러난 '한도십영'과 채만식의 소설 『탁류』 초판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인 이인직의 『혈의 누』 재판본, 보물 '대승기신론소'까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서(古書)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특히 채만식의 『탁류』 초판본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유일본으로 국립한국문학관 외에 다른 소장처가 없다. 서지학의 권위자이자 애서가인 고(故) 하동호 교수 유가족이 2018년 국립한국문학관에 『탁류』를 기증했다.
전시에서 『탁류』와 함께 눈여겨봐야 할 또 다른 유일본은 조선 초기 시집 『한도십영』이다.
『한도십영』은 조선 초기 한양의 풍경을 노래한 시 90편을 엮어 만든 책. 1479년 금속활자 초주갑인자로 인쇄한 보물급 문화재다. 대제학을 지낸 서거정을 비롯해 강희맹, 이승소, 성현, 월산대군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한양의 경치’를 주제로 시를 썼다.
‘목멱산(남산)에서 꽃을 감상하다(木覓賞花)’, ‘양화나루에서 눈을 밟다(楊花踏雪)’, ‘마포에 배를 띄우다(麻浦泛舟)’, ‘입석포(성동구 성수동)에서 낚시하다(立石釣魚)’ ‘흥덕사에서 연꽃을 감상하다(興德賞蓮)’, ‘종가(종로)에서 관등놀이를 구경하다(鍾街觀燈)’, ‘제천정(용산구 한남동)에서 달을 구경하다(濟川翫月)’ 등 익숙한 지명이 다수 나와 옛 풍경을 상상하며 읽는 재미가 있다.
전시에서는 그 밖에도 단군신화가 처음으로 기록된 ‘삼국유사’, 최초의 한글 창작물인 ‘용비어천가’ 등 한국문학의 역사적 기점이 된 중요한 자료를 볼 수 있다.
전시된 문학 자료의 글귀 중 소장하고 싶은 구절을 선택해 나만의 책갈피를 만들 수 있는 체험행사도 열린다.
문정희 관장은 “지난 5년간 수집한 보물 같은 작품 11만점 중 70점을 엄선해 보여드리는 전시”라며 “세계적으로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시기에 한국 문학이 형성된 과정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가 한국인의 근원적 힘과 상상력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면서다.
국립한국문학관은 2016년 문학진흥법 제정을 근거로 2019년 법인이 설립됐다. 지난 5월 문학관 착공식을 거쳐 2026년 하반기 정식 개관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