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사물 폭탄’의 신호탄? “휴대전화도 터질라” 공포 휩싸인 레바논

2024-09-20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대원 등이 소지한 무선 호출기(삐삐)와 무전기(워키토키)가 이틀 연속 대규모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한 레바논에서 ‘통신기기 공포’가 확산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통신기기가 한순간에 치명적인 ‘폭발물’로 돌변해 다수를 공격했다는 점에서, 일상 전자용품을 ‘무기화’하는 새로운 차원의 사보타주(파괴 공작)가 시작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17일(현지시간) 레바논 전역에서 무선 호출기 수천대가 연쇄적으로 폭발한 데 이어 이튿날 무전기까지 동시다발 폭발하자, 레바논 시민들은 휴대전화나 노트북 등 다른 전자기기들도 터질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고 BBC가 19일 보도했다. 이번 폭발 공격의 배후로 지목된 이스라엘이 통신기기 공급 과정에 개입해 폭발물을 심은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공급망을 이용한 테러 공격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특히 레바논 남부 일대에서 주택의 태양광 에너지 패널 등이 잇따라 폭발했다는 보고까지 나오자 혼란이 증폭됐다. 레바논 여성 기다는 “모두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면서 “노트북이나 휴대전화를 곁에 둬도 될지 모르겠고, 현 시점에선 모든 것이 위험해 보인다”고 말했다.

BBC는 베이루트 남부 다히예에서 자사 특파원들이 거리에서 휴대전화나 카메라를 사용하지 말라는 요구를 여러 번 받았으며, 일부 시민들은 거리에서 다른 사람 옆에 가까이 가는 것도 두려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헤즈볼라 거점으로 알려진 다히예는 폭발 피해가 집중된 지역 가운데 하나다.

이틀간 이어진 연쇄 폭발로 인한 사망자는 총 37명으로 늘어났으며, 부상자도 3200명을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현지 병원에서 부상자를 치료한 엘리아스 와락 박사는 부상자 중 60%가 실명했고, 많은 이들이 손가락이나 손 전체를 잃었다고 말했다.

부상자 상당수가 호출기가 울리자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폭발 피해를 입어 크게 다쳤다. 와락 박사는 “의사로서 최악의 날이었다”면서 “피해가 눈과 얼굴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뇌 손상을 입은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겨냥한 이번 공격은 다수가 소지하고 있던 휴대용 통신기기를 길거리, 시장과 상점, 사무실, 가정집 등 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제히 터뜨림으로써 큰 충격과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전선이 아닌 민간 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연쇄 폭발로 인해 헤즈볼라 구성원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민간용 물건을 ‘무기화’해선 안 된다고 경고하고 나선 것은 이 때문이다. 사상자 중에는 어린이 등 민간인도 다수 포함됐으며, 연쇄 폭발로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일상적인 기기가 엄청난 규모의 소형 수류탄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이번 사건이 “파괴 공작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짚었다. NYT는 첩보기관이 휴대전화에 폭발물을 심는 등 통신기기를 활용한 공작을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이번 공격은 한꺼번에 수천 대의 기기를 원격으로 조작해 터뜨렸다는 점에서 “전자 사보타주의 어두운 기술을 새롭고 무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도 이 공작이 전자기기 등 일상 용품이 ‘무기화’되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에서 법률 자문위원을 지낸 글렌 거스텔은 “이번 공격은 휴대전화부터 온도조절기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전자기기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예고편’일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컴퓨터와 휴대전화는 물론 세탁기, 냉장고 등 각종 가전제품을 인터넷으로 연결해 제어하는 사물인터넷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이를 이용한 ‘사물 폭발물’ 사보타주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거스텔은 “우리는 이미 러시아와 북한이 사이버 공격으로 전 세계 컴퓨터를 훼손한 것을 목격했다”며 “다른 개인·가정용 기기가 다음 목표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NYT 또한 “역사적으로 이런 파괴 공작은 한 번 문턱을 넘으면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이번 공격의 우려스러운 지점이라고 짚었다.

헤즈볼라 고위급 지휘관 피해 적어…‘공포 확산’ 이스라엘 심리전?

이스라엘이 이번 공격의 핵심 목표로 삼았던 헤즈볼라의 고위급 지휘관들은 정작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말도 나왔다. 폭발을 일으킨 호출기와 무전기는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의 휴대전화 위치 추적 등을 피하기 위해 5개월 전 레바논에 들여온 신형 모델로, 고위급 간부들은 그 이전부터 구형 모델을 사용하고 있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헤즈볼라 수장인 하산 나스랄라도 19일 영상 연설에서 헤즈볼라 조직원들이 폭발한 호출기 4000대 이상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고위급 간부들은 이를 소지하지 않았다며 “우리의 지휘 통제 기반엔 영향이 없다”고 밝혔다.

헤즈볼라와 가까운 레바논 분석가인 카심 카시르는 폭발한 통신기기들은 대부분 헤즈볼라의 민간 부문 노동자들이 소지하고 있었고, 군인이나 안보 요원의 피해가 적었다고 AP통신에 말했다.

이번 공격이 헤즈볼라의 전투력에 큰 타격을 입히는 전략적 목표보다 조직과 국가 전체에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는 일종의 ‘심리전’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10만명이 넘는 헤즈볼라 병력 규모를 고려할 때 이번 작전이 미칠 군사적 타격은 미미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일상적인 물건이 ‘죽음의 무기’로 돌변할 수 있다는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싱크탱크 국가안보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인 오르나 미즈라히는 “이번 공격으로 헤즈볼라 통신망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더 큰 피해는 심리적인 것”이라며 “이 조직이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얼마나 노출돼 있는지 드러난 굴욕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영국 카디프대학 국제관계 연구자인 아말 사드는 “앞으로 헤즈볼라는 모든 것이 해킹되고 조작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극도로 우려할 것”이라며 “이번 공격의 가장 큰 여파는 그들의 사기 저하와 두려움이다”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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