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장기집권 수법이 “너무 귀엽다”는 트럼프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10-30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9년 이른바 ‘3선개헌’이 추진됐다. 대통령의 연임을 한 차례로 제한한 헌법 조항을 고치는 것이 개헌안의 핵심이었다. 1963년 처음 당선되고 1967년 재선에 성공한 박 대통령이 1971년 3연임에 도전할 수 있게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야당은 당연히 반발했고 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시 공화당 소장파 의원이던 이만섭(훗날 국회의장)이 박 대통령에게 찾아가 따져 물었다. “후계자에게 4년간 맡긴 뒤 4년 후에 다시 정권을 잡으시면 되잖습니까?” 이에 대한 박 대통령의 답변이 걸작이다. “대통령이 된 사람이 자기 조직을 짜고 군대까지 장악할 텐데 4년 후 내놓을 사람이 있겠어!”

그런데 박 대통령 생각과 달리 ‘4년 후 내놓은 사람’이 정말 있었다. 물론 1960∼1970년대 한국은 아니고 먼 훗날 러시아에서 벌어진 일이다. 2000년 처음 당선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04년 재선에 성공했다. 대통령의 3연임을 금지한 당시 러시아 헌법에 따라 푸틴은 2008년 일단 물러났다. 푸틴의 핵심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총리가 2008∼2012년 대통령을 지내는 동안 푸틴은 총리로 내려앉았다. 다만 이 기간 러시아는 총리(푸틴)가 실세이고 대통령(메드베데프)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2012년 메드베데프에게 맡겨 놓은 대통령직을 도로 찾은 푸틴은 헌법부터 고쳤다. 대통령의 연임 제한 규정을 무력화한 것은 물론 그 임기도 4년에서 6년으로 늘려 영구 집권을 위한 기틀을 다졌다.

현재 메드베데프는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으로 재직 중이다. 이렇다 할 권한은 없으나 대외적으로 푸틴에 이은 러시아의 ‘2인자’로 통한다. 푸틴과의 약속을 철석같이 지킨 메드베데프는 ‘의리의 사나이’일까. 아니면 권력에 대한 욕심도, 권력을 유지할 능력도 없는 ‘바보’에 불과한 걸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견해는 후자 쪽인 듯하다. 지난 8월 메드베데프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러시아를 제재하겠다”는 트럼프의 발언을 맹비난했다. 이에 분개한 트럼프는 메드베데프를 “자신이 여전히 대통령이라고 착각하는 실패한 전직 러시아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말이 ‘전직 대통령’이지 정작 대통령 임기 동안에도 ‘푸틴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했던 것 아니냐는 조롱으로 풀이된다.

미국에서 대통령은 딱 두 번만 할 수 있다. 앞서 45대 대통령(2017∼2021)을 지낸 트럼프는 현 47대 대통령 임기가 마지막이란 얘기다. 미국 헌법이 그렇게 돼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여러 차례 ‘3선에 도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헌법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에도 막무가내다. 그러자 누군가 이런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오는 2028년 대선에 트럼프가 일단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다. 트럼프의 말을 잘 듣는 대통령이 취임 직후 하야하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트럼프 곁에 메드베데프 같은 측근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트럼프는 이 시나리오를 “너무 귀엽다(too cute)”고 칭찬하면서도 “옳지 않은 일”이라며 거부했다. 그래도 트럼프가 푸틴보다는 더 자유민주주의에 가까운 지도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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