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4일, 러시아 연해주 핫산군과 나데진스키군을 연결하는 도로개설공사를 하던 포크레인 기사 미하일은 30cm 땅 아래에 묻혀 있는 잘 다듬어진 돌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아이들 그림이 그려져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붉은 별 문양과 한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비는 이곳 나데진스키 출신의 고려인 향토연구가 박 발렌틴에게 옮겨졌다. 고려인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박 발렌틴은 <남우수리지역의 첫 한인 이주민 가족>을 발간한 저명인사다. 이 소식은 곧장 연해주 사회에 알려졌다. 마침 러시아 시베리아와 연해주 고려인 마을을 탐사 중이던 필자와 연해주한인회 이동명 회장이 심층 탐문을 벌이게 되었다.
비가 발견된 장소는 연해주 나데진스키군 티호에 마을(Надеждинскийрайо н Село тихое, удугоу). 우수리 스크 라즈돌노예역에서 핫산군 방향으로 향하는 우수리강 하구 마을로, 과거에는 수이푼·추풍 지역에 속한 한인촌이었다. 두만강으로 통하는 길목인 수이푼은 연해주 한인 의병들의 거점 지역이었다. 특히 러시아로 망명 간 의병장 유인석이 13도의군을 창설한 암바피라(현 암바강 유역)와 하마탕, 육성촌, 솔밭관이 멀지 않다. 비가 발견된 티호예 마을의 원지명은 우두거우(이도구 二道溝)다. 우두거우 집단농장(꼴호즈) 건설은 솔밭관 한인 제대 의병이 주도했다. 고려인이 발행한 <선봉>과 <레닌 기치>에도 우두거우 신세계 집단조합(Новый мир)이 등장한다. 어쨌든 티호에 마을은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 후에는 슬라브계 러시아인 정착촌이 되었고, 마을 보육원(Дом учительница)이 들어섰다. 2024년 도로개설을 위해 폐허가 된 보육원 잔해를 걷어내던 중에 비가 발견된 것이다.
연해주 한인회 조사팀은 두 차례에 걸쳐 현장 탐문을 벌였다. 비가 발견된 티호에 마을은 두만강 핫산으로 내려가는 철도변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현장소장 알랙산더, 포크레인 기사 미하일 씨를 만나 경위를 파악했다. 비를 캐낸 장소는 보육원이 있었던 터였는데 이미 건물 잔해를 다 걷어낸 상태였다. 일부에서는 한글을 모르는 마을 사람이 비를 민가 건축재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달랐다. 기념비의 가치를 아는 누군가가 공동묘지에 있던 비를 이곳 보육원으로 옮겨 놓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공동묘지는 약 600~700미터 떨어진 야산에 있다. 비 아랫부분을 기단에 끼울 수 있도록 다듬어진 것으로 봐서는 발견되지 않는 기단석은 공동묘지 어디엔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비석 앞면 아래에 있는 구멍 두 개는 기단 위에 비석을 세울 용도로 보이나 중간치 구멍은 알 수 없다.
가로 46cm 세로 76 크기의 기념비는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엄격히 말하면 기념비라기보다 비석에 가깝다. 해당 인물의 행적과 이력을 밝혀둔 뒷면은 그런대로 온전한 상태이나 정작 당사자 성명이 새겨진 앞면은 해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풍화가 심했다. 앞면에는 한글 손 글씨체 127자가 오목이 패여 있다. 조선이 식민 통치를 받는 엄중한 시기였음에도 러시아 글과 한자 글은 단 한 자도 보이지 않는다. 비문 전체를 순 우리 한글체로 새긴 점은 이들의 강한 애국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비석 머리에 새겨진 ‘붉은 별’(깨빼·КП)은 러시아 빨치산의 이니셜이다. 맨 아래에 있는 ‘림표’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세움의 표식으로 읽힌다.
조사팀은 비문을 여러 각도로 촬영해 음각 글씨체를 좀 더 꼼꼼히 살펴 나갔다. 세로로 새겨진 앞면을 눈여겨 살펴도 성명 해독이 어렵다. 물을 뿌려 솔질을 하자 희미하게나마 ‘황’자 한글체가 도드라졌고, 그 아래 글자는 아예 불명확하다. 그 아래는 어렴풋이나마 ‘호’ 혹은 ‘오’자로 읽혔다. 맨 아래에 있는 ‘의 묘’는 뚜렷이 식별되었다. 비문을 정리하면 이렇다.
앞면 ‘황0호의 묘 월00日’ / 뒷면(비석머리에 ‘☆’이 그려졌다) 1904~19년 고려해방운동의 조직자이며, 1919~22년 연해도내(솔밭관)에서 쏘베트주권을 위하여 고려 붉은 의병의 조직자이며, 1923~32년 농촌 경리를 사회주의 경리로 개조하는 건설사업에 용감적 조직투사이엇다. 빨치산섹지야 주최로 동무들이 림표. 1935년 5월 1일
이 비를 분석한 러시아 극동대학교 한국어과 톨스토쿨코프 이고리 아나톨리예 교수 역시 황원호 기념비로 감정했다.
☆1904~19년 한국의 독립운동의 조직자 및 활발한 참여자, 1919~22년 연해주 소비예트정권 수립을 위해 싸운 적군 한국인 의용부대(솔밭관)의 조직자 및 조직투사, 1923~32년 사회주의 경영 원칙에 따른 농업 구조조정 운동의 조직자 및 활발한 참여자. 파르티잔 섹션에서의 동지들로부터 1935년 5월 1일
여러 정황상 황원호 선생의 기념비가 분명하다. 더구나 뒷면에 새겨진 해당 인물의 행적은 고려인 기관지 <선봉> 신문에 나오는 ‘황원호 동무를 곡함’이라는 부고(1932년 8월 14일자) 기사와 일치한다.
‘황원호 동무는 1932년 7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동무는 1904년부터 1919년까지 고려민족해방운동에 맹렬히 투쟁하였으며, 1920년도에 솔밭관공산당군대에 가입하여 입당하고, 쏘베트주권을 위하여 백파들과 투쟁하였으며, 1922년부터 1932년까지 우두거우 신세계조합에서 열성적으로 사업을 하였을 뿐 아니라 그 조합의 조직자였다.’
이 기념비는 황원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해인 1932년 세운 것이 아니라 사후 3년이 지난 뒤인 1935년 그를 숭모하는 한족공산당 솔밭관 동무들(우두거우 빨치산섹지야)이 세운 기념비로 보인다. 앞뒷면의 날짜가 서로 다른 점으로 봐서는 1935년 5월 1일 동무들이 결의하고, 5월 4일 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황원호는 누구인가
황원호(黃元浩 1877년~1932년) 선생은 불꽃처럼 살다 간 ‘찐 혁명투사’였다. 여기에 굳이 ‘찐’을 붙이는 이유는 1904년 러일전쟁부터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한평생을 총성 울리는 망명지에서 고군분투한 전설적 인물이어서다. 이용익 계열이었던 황원호 선생은 러시아 원동 솔밭관에서 붉은 의병으로 활동했다. 고려인을 괴롭히는 마적단 퇴출과 우두거우 집단농장(콜호즈) 경영 등 고려인을 지키고 단결을 도모하는 데 고군분투했다. 본인은 러시아 원동 우두거우에 잠들었지만 그의 아내와 형제는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 이후 카자흐스탄 신세계 집단농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에서 애족장을 수여하였으나 업적에 비하면 약한 서훈이다.
황원호 선생은 함북 경성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8년 아버지를 따라 두만강을 넘어 청국 간도 사동으로 이주하였다. 혁명투사의 생애는 험난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의병에 참전, 러시아 수이푼으로 이동했다. 1919년에는 이만(달리네첸스크) 조선인 군중대회에 참가하고, 원동의 다수 고려인촌락에 독립선언서를 전파했다. 1919년 5월 솔밭관 청년회 조직에 가입하였고, 1920년 연해주 추풍 당어재골 신길동에서 솔밭관 한족공산당을 조직, 무장단체군 ‘우리 동무군’(이후 고려혁명군으로 개칭) 참모장이 되었다. 솔밭관 붉은 군대는 4월 참변 이후 한인사회당 대한국민의회 세력이 아무르와 자바이칼로 대피한 이후에도 왕성히 활동했다. 1921년 5월과 8월에는 마적단을 퇴출하고, 1922년 5월 5일에는 백파와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살상하였다. 1922년 8월 솔밭관 파르티잔부대는 소왕령(현 우수리스크)에서 소만국경까지 적을 추격하였다. 1922년 일제 간섭군이 연해주에서 철수할 때까지 무장 항일유격대 지도자로 활약했다.
원동에서 ‘쏘베트주권’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 황원호 선생은 제대 대원들과 함께 수이푼 구역 우두거우에 신세계 집단농장(새세계 꼴호즈)를 조직하고 초대 관리위원장이 된다. 황원호 선생은 10년간 집단농장을 지도하며 농민들을 위해 성실히 일했으나 원래 토지가 척박하여 높은 수확을 얻지 못하자 우두거우 앞벌을 개간해 논으로 풀었다.
1990년 5월 31일자 <레닌 기치>의 ‘혁명일가’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황원호와 동생 황원국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무장횃불을 올린 곳도 원동이며 소비에트주권의 승리를 위하여 외래무장간섭과 백파들을 반대하며 승리의 마지막까지 싸웠고, 싸워 승리한 땅도 원동이다. 황원호·황원국 투사 형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원동 땅의 소비에트 주권 승리를 위하여 투쟁한 혁명가이자 꼴호즈 조직의 선구자였다.’
우리는 이 기회에 연해주 독립운동사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황원호 선생의 한글 기념비가 발견된 우두거우는 한국 관광객이 접근하기 쉬운 지역이다. 블라디보스토크, 핫산군, 우수리스크, 라즈돌노예 일대에는 여전히 한인과 관련된 역사 유적들이 남아있다. 특히 우두거우는 조명희 선생의 망명 생활 첫 작품인 <북은 깃발 아래에>를 쓴 곳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집필 원고가 소실되어 후세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추풍 자피고우 노동영웅 김병화도 솔밭관 의병부대 무기 보급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원호 선생 기념비를 감정한 반병률 교수(한국외국어대)는 역사관 설립을 제안했다. 반 교수는 “연해주 항일운동의 구심지였던 우두거우에 국가 차원의 기념비와 역사관을 세워 연해주 독립운동사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견된 기념비는 여러 의미를 지닌다. 항일운동의 구심지였던 한인촌에서 기념비가 발견되었고, 해외사적물이 될 가치 있는 유물이다. 약 90년 만에 발견된 기념비의 의미를 소중히 받들기 위해서는 기념비 국내 봉환과 우두거우 원부지 조사가 시급하다. 대한민국 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에서는 관심을 기울여주길 바란다.
배성동 시민기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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