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복지란 무엇일까. 그것은 특별한 은혜나 시혜가 아니다. ‘나와 똑같은 대접’을 받는 것, 그것이 복지의 가장 근본적인 정의다.
지금 우리는 폭염이라는 기후 위기의 최전선에 서 있다. 숨이 턱 막히는 더위 속에서 우리는 시원한 실내에서 에어컨을 틀고 버틴다. 하지만 복지의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선풍기 한 대를 전하며, ‘도왔다’고 말한다면 그건 정말로 돕는 것일까?
진정한 복지는 함께 견디는 것이다. 나와 같은 조건에서, 나와 같은 불편을 느끼고, 나와 같은 도구를 갖게 하는 것. 그것이 복지다. 나에게는 에어컨이 있고, 이웃에게는 선풍기 한 대를 쥐여주며 생색을 낸다면, 그것은 복지가 아니라 통제이고 동정이며, 공동체를 가장한 위계다.
복지는 동정이 아니다. 복지는 종교적인 시혜가 아니다. 복지는 ‘우리’라는 공동체가 서로를 동등하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출발한다. ‘저 사람은 가난하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라는 생각.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이웃’이 아니라 ‘타자’로 만들어버린다. 타자는 돕는 대상이지,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복지의 철학은 분명하다.‘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당신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복지의 출발점이고, 최종 목적지다. 누군가는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않냐”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속에는 이미 무의식적인 차별이 깃들어 있다. 있는 사람의 시선, 가진 자의 평가, 베푸는 자의 자만. 우리는 그것을 복지라 착각해왔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다. 권리다. 복지는 감정이 아니다. 제도다. 복지는 나눔이 아니다. 구조다. 나는 괜찮고, 너는 조금 불편해도 된다는 세계는 결코 ‘같이 사는 사회’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떤 대접을 받고 싶을까?” 그렇게 묻는 순간부터, 복지는 비로소 시작된다. 똑같이 앉아,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이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 그때 우리는 서로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진정한 복지는, 그 사람을 나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복지를 실천하며, 사람을 지켜낸다.
명본 스님 (사)울산그린트러스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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