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과학기술로 다시 미래를 선도할 대한민국

2025-12-10

간단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세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는 어떤 학자가 발명했을까? 머릿 속에 '컴퓨터 과학자'라는 답이 떠올랐다면, 발명 이전에 컴퓨터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틀린 대답이다. 정답은 존 아타나소프(John Atanasoff)라는 미국의 '물리학자'다.

몇 가지 예시를 더 들어보겠다. 인공지능(AI)계의 대부라 불리는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 데미스 허사비스는 AI학이 아닌 '인지신경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정보화 혁명의 포문을 연 월드와이드웹(WWW) 역시, 인터넷 공학자가 아니라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입자물리학자'들이 개발한 기술이다.

이 예시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진정한 혁신이 '기초'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필자는 기초과학을 곧 첨단과학으로 인식해야한다는 오랜 신념을 지니고 있다. 30여년을 핵물리학, 입자물리학 등에 매진한 과학자로서 기초과학이 종종 '비실용적'이거나 '경제적 가치가 낮은 연구'로 폄하받는 경우를 보면 속상함을 감추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올해 7월 13일 과기혁신본부장으로 부임한 이래 가장 큰 관심사는 과학 연구와 기술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충은 단편적인 대책만으로 결코 해소될 수 없다. 과학 연구의 A부터 Z까지 전방위적인 혁신, 즉 생태계 자체의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 과기정통부가 '연구개발 생태계 혁신방안(이하 혁신방안)'을 수립한 이유다.

◇'연구개발 생태계 혁신방안'의 개요

우리나라는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연구개발(R&D) 투자규모 세계 5위,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율 세계 2위 등 성공적인 지표에도, 막상 현장의 목소리는 다르다. 이공계 인구는 감소 중이며, 우수한 인재들은 한국이 아닌 해외를 택하고 있다. 우리 생태계의 어딘가에 허점이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과기정통부는 연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대통령·부총리·차관부터 정책 실무자들까지 모두가 연구현장을 찾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물었다. 답변을 모아 살펴보니 수많은 연구자들이 느끼는 불편함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혁신방안의 골자가 되어, 연구자가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개선을 이뤄내고자 했다.

혁신방안은 연구자들이 마음껏 도전하고 창의적인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생태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R&D의 3가지 핵심 주체인 연구자, 연구기관, 정부가 상호간 협력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시하려 한다.

◇연구자가 도전·창의적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 조성

먼저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제기한 요구 중 하나는, 쉬운 연구에만 치중하게 만드는 현 시스템의 개선이었다. 따라서 과기정통부는 연구자들에게 '실패할 자유와 권리'를 주기로 했다. 기존의 4단계 평가등급(우수-보통-미흡-극히불량)을 폐지하고 혁신성을 기준으로 과제를 평가함으로써 도전적인 목표 설정을 장려하고자 한다. 설령 목표에 미달한 연구라도 의미 있는 과정이나 성과가 있다면 우수한 연구로서 인센티브를 줄 것이다. 이러한 모든 내용의 근간인 연구 평가가 정확히 이뤄지도록 위원 실명제, 수당 확대 등으로 평가위원의 전문성과 책임성도 강화할 것이다.

연구 외의 행정 업무에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 역시 주된 불만 중 하나였다. 일례로, 연구자가 느끼는 부담 중 하나인 과도한 연구비 증빙이 줄어들도록, 규제의 관점에서 벗어날 예정이다. 예컨대 연구비 사용을 연구자의 자율과 책임에 맡기되 부정사용 시 2~30배의 강력한 제재를 부과하는 것이다. 460여종에 달하던 과도한 행정 서식도 필수 서식으로만 최소화할 예정이다.

◇연구기관의 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 체계 마련

연구자가 연구자 본연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연구기관도 응당 그래야 한다. 출연연의 경우 인건비 확보를 위해 주제를 불문하고 과제 수주 경쟁에 뛰어들며 본연의 역할에서 멀어지는 현상이 자주 목격됐다. 그 원인으로 지목된 PBS(Project Based System) 제도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출연연이 우수 연구자를 확보하도록 보수 체계와 채용 제도를 개편할 예정이다.

대학교를 위한 지원도 면밀히 준비했다. 특히, 다양한 분야에서 지적되는 수도권과 지방 간 격차 문제는 R&D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지방이 수도권에 비해 열악한 연구 환경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해, 지역 자율 체계를 도입함으로써 지방정부가 연구를 기획·집행하고 균형 발전을 촉진할 것이다. 또 지역 거점 대학은 수도권에 준하는 연구 경쟁력을 갖추도록 연구비와 석·박사 지원을 확대할 예정이다.

한편, 2023년 민간을 포함한 우리나라 전체 연구개발비의 79.2%가 기업에 의해 수행됨에도, 기존 R&D 지원 정책이 기업이 아닌 대학과 출연연에 최적화된 방식이라는 불만도 있었다. 따라서 기업부설연구소의 R&D 역량 진단 모델을 고도화해 기업의 규모, 특성 등에 따른 맞춤형 지원을 제공할 예정이다.

◇R&D 생태계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정부 시스템 혁신

2023년 정부의 R&D 예산 삭감은 연구현장에 큰 충격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앞으로는 매년 정부 총지출의 5% 수준으로 R&D 예산을 확대해 연구자들에게 신뢰를 제공할 예정이다.

끝으로, 수많은 연구자들의 데이터가 각자의 기관, 연구실에만 머무르는 문제점도 제기됐다. 정부는 모든 연구 데이터를 축적하고 공유할 수 있는 통합 관리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하나의 연구가 또 다른 연구 성과로 확산되는 기반을 마련할 예정이다.

◇혁신방안을 통해 달라질 대한민국 과학의 미래

필자 역시 대학교에 있던 연구자였다. 혁신방안을 설계하는 동안 모든 후배 연구자들이 진심으로 그들의 꿈에 도전하고, 좌절하고, 다시 도전하며, 마침내 성취하는 모습을 간절히 그렸다. 모든 혁신이 그러하듯 단기간에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겠지만, 과기정통부와 연구자들이 꿈꾸는 미래 대한민국의 청사진이 빠른 시일 내 실현될 수 있도록 혁신방안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린다.

박인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필자〉고려대 물리학과 학사와 석사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11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입자물리학 전문가로서 1998년 미국 예일대 연구교수, 로체스터 연구교수를 역임하고, 귀국 후 2004년부터 서울시립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 한국 대표하는 연구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재명 정부 첫 과기혁신본부장으로서 연구현장 목소리를 수렴해 R&D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연구환경을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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