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이창용의 파격 행보

2024-09-25

예나 지금이나 한국은행은 최고의 직장으로 꼽힌다. 통화정책을 수행하면서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국내 최고의 엘리트들이 몰린다. 암울한 시기도 있었다. 1997년 12월 31일 한국은행법이 전면개정되기 전까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은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다. 정부 입맛대로 금리를 주무르다 보니 ‘재경부 남대문 출장소’, ‘재경부 금리국’으로 불렸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한은의 독립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은행 감독권을 금융감독위원회로 넘겨주는 대신 독립성을 확보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 이후 한은은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한은사(寺)’가 그것이다. 서울 남대문로 도심 속의 장중한 석조 건물이 조용한 절간 같다는 것이다. 금융시장·통화정책을 수행할 때 주도적이지 못한 행보를 빗댄 일종의 비아냥이다.

그런 한은이 달라진 행보를 보인다. 그 중심에는 취임 3년째를 맞은 이창용 총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8년 만의 외부 출신 총재답게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숱한 화제를 몰고 다닌다. 한은은 지난 3월 돌봄업종에 한해 최저임금 차등적용을 제안했다. 6월엔 농산물 수입확대와 유통구조개선을 주장하며 송미령 농림수산식품부 장관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가장 민감한 분야인 입시문제에도 거침이 없었다. 8월에는 아이의 잠재력보다 부모 경제력·거주 지역이 서울대 진학을 좌우한다며 상위권 대학 입학 정원을 지역별 학령인구 비율로 선발할 것을 제안했다. 24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선 수도권 집값을 잡기 위한 해결책으로 강남 출신 학생에 대한 ‘대입 상한선 규제’까지 언급했다.

이 총재는 취임 이후 직원들에게 한국의 구조적 문제를 짚어낼 보고서 발간을 적극적으로 요청했다. 이 총재가 취임한 2022년 4월 이후 나온 ‘BOK(Bank of Korea) 이슈 노트’ 보고서는 총 94건이다. 연간 36건꼴로 이전 같은 기간의 두 배에 이른다. 그가 ‘한은 맨’이 아닌 외부 인사라 과감한 자기주장을 펼치는지도 모른다. 이 총재 취임 이후 한은의 존재감이 커졌다는 의견이 많다. 한은의 ‘싱크탱크’ 역할도 필요하다. 다만 한은의 기본적인 책무는 통화정책을 통한 경제에 대한 기여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김기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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