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술유출 못 막는 산업기술보호법’ 왜 방치하나

2025-05-07

외국계 자본의 국내 기업 인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 외자 유치라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국가핵심기술 유출의 우회통로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외국계 자본의 국내 기술 탈취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0년대 초 국내 디스플레이 기업이 외국계 기업에 인수된 뒤 기술이전 계약에 포함되지 않았던 핵심기술까지 넘어간 사례가 있었다. 해당 외국 기업은 인수 후 양사 전산망을 통합해 기술자료에 광범위하게 접근했고 수천 건의 데이터를 본국으로 이전했다. 몇 년 후 이 기업은 부도 처리되었고 우리는 핵심기술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다.

또 다른 사례로 외국계 기업에 인수된 한 자동차 회사의 경우 국가 연구개발(R&D) 지원으로 개발 중이던 첨단 엔진 및 제어기술의 유출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실질적인 증거 확보는 어려웠다. 이처럼 과거에는 직접 인수를 통한 기술 유출이 심각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외국계 자본이 국내 법인이나 단체를 통해 우회적으로 지배권을 확보하는 방식이 교묘하게 활용되고 있다.

문제는 현행 산업기술보호법령이 ‘외국인’을 외국 국적 개인과 외국법에 따른 법인으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외국 자본이 지배하는 국내 법인이나 단체가 법망의 틈을 노려 기술유출 통제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입법 예고된 산업기술보호법 시행령 개정안에 이러한 ‘외국인’의 범위 확대 관련 내용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산업부는 지난해 말 ‘제5차 산업기술 유출방지 및 보호 종합계획(2025~2027)’을 통해 ‘지배권 행사 여부’를 기준으로 외국인의 범위를 조정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 개정안에서는 이 핵심 내용이 빠졌다.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외국계 자본의 국내 투자를 돕는 입장에서는 법령 개정을 통한 외국인 범위 확대가 투자 의욕을 꺾는다고 우려할 수 있다. 또 다른 규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국가핵심기술 보호는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경제안보, 기술안보 시대에서 국가경쟁력 유지의 필수조건이다.

선진국들 역시 비슷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적극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미국은 ‘외국인에 의해 통제되는 모든 단체’까지 심의 대상에 포함시키며, 최근 일본 기업의 미국 철강기업 인수도 안보상 이유로 금지했다. 독일은 외국인 투자가 안보를 위협할 경우 그 거래를 제한하고, 일본은 주요 산업에 대한 투자에 대한 사전신고 기준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우리도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하는 심사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외국인’의 정의를 확대하고, 외국계 자본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국내 법인이나 단체도 심사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 외국인투자 유치라는 단기 실적보다는 국가경쟁력과 경제안보라는 더 큰 가치 틀에서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 지금이라도 시행령 개정안에 ‘외국인’의 범위 및 ‘간접 지배’ 관련 조항을 반영하여 재입법예고 절차를 밟아야 한다. 국가핵심기술 보호는 국가경쟁력의 근간을 지키는 일이다. 법적 사각지대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이창무 중앙대학교 산업보안학과 교수·前 한국산업보안연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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