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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작가이자 언어학자인 J.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에는 세상을 지배할 만한 가공할 힘을 주인에게 부여해 주는 절대반지가 등장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절대반지를 소유하기 원했고, 반지의 유혹에 한 번도 굴복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다.
바야흐로 '통상의 시대'가 돌아왔다. 관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표현한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관세는 절대반지인 듯하다. 중국산 전체 수입품목에 10%포인트(P)의 추가관세를 부과한 것을 시작으로 3월부터는 30일을 유예한 멕시코, 캐나다에 대한 관세부과가 시작된다. 한국의 주요 대미 수출 품목인 철강과 알루미늄에도 예정대로라면 3월 12일부터 25%의 관세가 부과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동차, 반도체 등에도 4월부터 순차적으로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통상환경에 대응하고자 정부는 지난 18일 범부처 비상수출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미국발 무차별 관세에 따른 피해 기업 지원을 위해 관세대응 수출바우처를 도입하고, 366조원 규모의 무역금융을 통해 수출기업의 유동성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동시에 수출시장 다변화를 위해 '글로벌 사우스' 등 신흥국 대상의 해외마케팅을 대폭 지원하겠다는 것이 대책의 골자다. 무역협회가 2월 초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수출기업들은 통상애로 해소를 위해 정책금융 확대, 해외마케팅 지원, 그리고 선복확보 및 물류비 지원이 가장 시급하다고 응답했다. 기업의 이러한 니즈가 관세리스크 대응에 초점을 맞춰 이번 비상수출대책에 고르게 반영됐다.
이제 겨우 베일을 벗기 시작한 '트럼프 관세종합세트'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꺼번에 모든 지원책을 풀어놓기보다는 플랜B, 플랜C 등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비한 추가지원책을 비단주머니처럼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정부와 수출업계 사이에 실시간으로 긴밀한 소통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지금은 업계 지원책 마련과 더불어 통상리스크의 진원지이자 당사자인 미국을 상대로 한 설득 준비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과 동시에 공포한 '미국우선통상정책'에서 지시한 무역적자 해소 및 불공정무역 대응을 위한 제반 조치들의 검토시한은 앞으로 한 달 남짓 남았다. 통상협상에서 미국을 설득할 논리를 전략적으로 가다듬고 사안별로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국가들과의 공조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공을 들이며 대책을 마련해야 할 골든타임이다.
작금의 통상환경을 낙관할 수 없음은 분명하지만 지나친 비관 또한 금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관세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 조치로 이어진 것은 대중국 10%P 추가관세뿐이다. 일단 막강한 무역조치 가능성을 언급한 뒤 상대로부터 원하는 바를 얻어낸 다음 실제 시행여부와 수위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트럼프식 협상 방식이다. 지금은 수출업계의 현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업종별 영향과 피해를 면밀하게 예상해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아낼지 우리 측의 최종 손익계산서를 보다 정밀한 셈법으로 가늠해 봐야 한다.
'반지의 제왕'은 결국 특출한 누군가가 절대반지를 손에 넣어 세상을 지배한다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에서 절대반지는 결국 운명의 산에서 용암에 빠져 파괴된다. 이제 막 4년 임기를 시작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조치 역시 반드시 그가 의도한 결말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산업별로 파급 영향이 차별화돼 명암이 교차될 수도 있다. 4년 후 한국 수출이 보다 강한 회복탄력성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지금 민관이 머리를 맞대고 보다 긴 호흡으로 수출전략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정희철 한국무역협회 무역진흥본부장 kita_21000@kit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