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글로벌 인공지능(AI) 신약 개발 업계에서는 초대형 계약이 잇따라 터졌다.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이 설립한 AI 신약 개발 기업 아이소모픽랩스는 일라이릴리와 최대 17억 4500만 달러(약 2조 4000억 원), 노바티스와 최대 12억 3750만 달러(약 1조 7000억 원) 규모의 계약을 맺고 신약을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AI 신약 개발 기업 미국 리커전파마슈티컬스(리커전)는 또 다른 AI 신약 개발사 영국 엑센시아(Exscientia)를 계약금 6억 8800만 달러(약 9500억 원)에 흡수 합병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AI 신약 개발을 위한 인수합병(M&A)과 공격적인 파트너십 체결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국내는 전무하다. 국내의 경우 AI로 발굴한 신약을 임상 궤도에 올린 기업들도 매년 100억 원 이상의 적자를 내고 있다. 실제 국내 임상 2상을 완료한 이노보테라퓨틱스는 지난해 약 130억 원, 글로벌 임상 1상을 진행 중인 파로스아이바이오는 지난해 약 126억 원의 적자를 냈다. 국내 AI 신약 개발 기업 중 최초로 해외 투자를 받아 이목을 끌었던 스탠다임은 최근 구조조정을 단행해 임직원을 80명에서 27명으로 줄였다.
국내에서 관련 산업이 정체되고 있는 것은 고품질 데이터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신약 개발에 데이터를 활용하려면 약물 반응 정보가 포함된 데이터 생산이 필요하지만 국내에서는 폐쇄된 환경에서만 관련 데이터 접근이 가능하고 연구 외 목적으로 데이터를 구축한 사례가 많아 활용도가 떨어진다”며 “해외에서 신약 개발을 위해 생산한 데이터는 자국 연구자가 먼저 활용한 후 공개돼 혁신 신약 개발을 위한 가치는 낮아진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의료 데이터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2020년 개정된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신용정보이용 보호법)이 신약 연구 분야에서 오히려 ‘대못 규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성토한다. 데이터 3법은 환자로부터 사전에 동의를 받지 않았어도 개인정보를 가명 처리하면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가명 처리는 약효 분석에 필수적인 실사용증거(RWE) 수집을 가로막는다. 실사용증거란 환자의 건강 상태를 나타내는 실사용데이터(RWD)를 기반으로 어떤 치료 방식의 효과와 안전성 등을 보여주는 임상 증거를 말한다. RWE 기반의 질병 진행 데이터 등이 있어야 다양한 조건에서 시나리오를 해볼 수 있는 ‘가상 환자’를 만들 수 있는데 이 부분이 막혀 있다 보니 효과적인 신약 개발이 어렵다.
가명 처리 정보 재식별(익명화 정보에 속한 특정 개인을 식별)에 따른 처벌이 과도해 병원 등 데이터 보유 주체가 데이터 제공 자체를 꺼리는 점도 문제다. 개인정보보호법 28조는 ‘특정 개인을 알아보기 위해 가명 정보를 처리하면 전체 매출액의 3% 이하에 해당하는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미국 리커전에 10만 명 이상의 암 환자 데이터를 제공해 AI 신약 개발의 기폭제가 돼준 템퍼스AI와 같은 기업이 국내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글로벌 제약산업에서 AI를 통한 신약 개발은 게임체인저로 꼽힌다. 전통적인 방식의 신약 개발에는 평균 10~15년, 1조~2조 원 이상의 비용이 소요되고 성공률은 0.01%에 불과하다. 하지만 AI는 후보물질 탐색을 가속화하고 임상시험을 최적화해 신약 개발의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성공률은 높일 수 있다. 현재 AI 없이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할 경우 전임상까지 평균 5.5년이 걸리지만 AI를 활용하면 최대 80%까지 단축해준다.
전문가들은 의료 데이터 공개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꼽고 있다. 정상태 대한디지털헬스학회 부회장은 “별도 기금 등을 마련해 데이터를 공개한 개인에게 직접 보상하고 대규모 의료 데이터를 제공한 의료기관에 보험 수가 책정, 대가 산정 등으로 인센티브를 제공해 데이터 보상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데이터 3법 개정 이후 논의에서 밀려난 ‘옵트아웃(opt-out, 사후철회)’ 방식 도입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나온다. 옵트아웃이란 정보 소유자가 자신의 데이터 수집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명시할 때만 정보 수집을 금지하는 일종의 네거티브 규제 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