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상군 살해범’ 몰려 고문 시달린 이상출씨
진화위 ‘중대한 인권 침해’ 규명 후 국가배상 소송
정부, 대법 판례 들며 “진화위 결정 증명력 없어”
이씨 “억지로 눈 멀었겠냐···테러를 당한 느낌”

이상출씨(69)는 1981년 9월 ‘이윤상군 유괴 및 살해사건’의 용의자로 몰렸다. 경찰은 영장도 없이 이씨를 여관방으로 연행했다. 구금과 가혹행위가 5일간 이어졌다. 경찰 손가락에 오른쪽 눈을 찔려 시력을 잃었다. 이씨는 허위 자백을 했고 경찰은 자백 외 증거가 나오지 않자 “그냥 내보낼 수 없다”며 다른 혐의를 조작해냈다. 두 달 뒤 진범이 잡혔다. 이씨는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고문 후유증은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22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이씨 사건을 ‘중대한 인권 침해’로 규정했다. 진화위는 경찰이 이씨의 명예 회복을 위한 실질적 조치를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지난해 이씨는 국가의 배상 책임을 묻는 소송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는 “손해를 배상할 만한 위법행위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며 맞섰다.
지난 1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4부(재판장 박사랑)에서 첫 변론이 진행됐다. 변론이 끝난 뒤 이씨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제가 억지로 눈을 멀었을까요. 쥐약을 먹고 말지. 국가는 ‘우리는 모른다’며 덮어 놓고 끝이더라고요.” 이씨가 말했다.
28일 경향신문이 확보한 정부 측 준비서면을 보면, 정부는 “이씨가 불법행위 피해자라는 점이 명확히 증명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진화위 결정에 대해선 “개별 당사자가 해당 사건의 희생자라는 점을 명확한 증거에 의해 확정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증명 책임은 당사자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덧붙였다. 진화위 결정에 법적 증명력이 없기 때문에 이씨 측이 직접 법정에서 국가로부터 어떤 불법행위를 당했는지 입증해야 한다는 취지다.
‘경찰이 오른쪽 눈을 찔렀다’는 주장에 대해선 “반드시 다시 판단돼야 한다”며 더 구체적인 증명을 요구했다. 정부는 “진화위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어떤 조사를 거쳤고, 어떤 객관적인 증거자료를 취합해 결론을 도출했는지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이 같은 주장은 2013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내린 판례를 토대로 한다. 당시 전원합의체는 국가배상 사건에서 진화위 결정은 반증이 가능한 정도의 증명력만 가진다며 개별적인 증거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대법관 4명이 “진상규명 결정은 중대한 오류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그 자체로 매우 유력한 증거 가치를 가진다”고 했지만, 소수의견에 그쳤다.
정부가 대법원 판례를 빌미로 진화위 결정 자체를 부정하며 피해자에게 입증 책임을 떠넘기는 것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수십년 전 발생한 사건은 피해 입증이 더욱더 어렵다. 이씨 측 대리인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과거 피해를 입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진화위가 나서서 여러 상황을 조사하고 진실 규명을 결정하는 것”이라며 “법정에서 이런 점들을 부정하는 것은 꺼내기 힘든 과거의 아픔을 상기하는 피해자에게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또 “진화위 조사기록을 가져와서 다시 입증해야 한다면 도대체 진화위는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라며 “진실규명 결정이 나왔다면 최소한 입증 책임을 국가 쪽으로 전환하는 법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오는 6월4일 두 번째 변론을 진행한다. 이씨의 아내는 “첫 재판 날, 우리는 테러를 당한 느낌을 받았다”며 “45년 전 일이라 증거가 남아있지 않아 속수무책인 상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