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경향] “회사가 싫으면 관두고 딴 데 가든가.”
요즘 회사와 싸우는 사람에 관한 기사를 쓰면 십중팔구 이런 댓글이 달린다. 구구한 사연이나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 한 문장은 단숨에 비웃고 지나간다.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어?)’ 시대를 관통하는 악플이다. 그런데 이런 악플을 쓰는 건 어쩌면 그들 잘못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은 회사가 부당하게 대하면 나가고, 회사가 나가라고 하면 나가고, 내몰리면 나가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감히 회사와 싸운다는 걸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납작한 세상에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이 해고된 서울 명동의 세종호텔 앞 철제 구조물에 올라 지난 5월 13일 90일째 아침을 맞은 고진수씨(52)에게 ‘왜 다른 데 가지 않고 싸우느냐’고 물어봤다. 고씨는 “다른 데 갈 수 있다, 당연히. 그런데 다른 데 가면 다르냐는 거지”라고 했다. 그는 세종호텔에서 일식 조리사로 20년간 일했다. 코로나19 유행 2년이 다 돼가던 2021년 연말 해고됐는데, 막바지에 그가 받은 월급은 230만원이었다. 기술이 있으니 갈 데도 있고, 어딜 가도 전보다는 많이 벌 것이다.
그는 “왜 굳이 여기 남아 싸우냐는 질문은 10년 전부터 받았다. 나는 그게 지금 이 사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세종호텔만이 아니라 호텔업계 전반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비정규직으로 일한다. 조건은 다 나빠졌다. 경력 10년, 20년 되는 사람들이 임금은 10년 전 수준으로 받는다. 그런데 누구도 싸우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현재 호텔업계는 코로나19 당시의 충격을 극복했다. 팬데믹 직전인 2019년 서울 지역 호텔의 객실 매출액은 9814억원이었는데, 코로나19 이후인 2023년에는 객실 매출이 2조1648억원까지 뛰었다. 그러나 총매출액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서울 호텔 평균 33.36%에서 2023년 17.07%로 반 토막이 났다(한국호텔업협회 ‘호텔업 운영현황’). 재난을 이유로 인력을 줄이고 노동조건을 후퇴시키고는, 재난을 극복한 후에도 조여 맨 허리띠를 풀지 않고 있다. 일하는 사람의 몫은 적어지고 회사는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간다. 호텔이 노동집약적 산업이고, 호텔 서비스의 핵심이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다.
돈과 자본이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정하는 시대. 고씨가 하는 일은 그들에게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상상력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는 “(회사가) 아무 거리낌 없이 이런 일을 반복해선 안 된다. 싸우다 결과를 못 낼지언정 싸우는 데까지는 싸워서 자본도 이런 결정을 했을 때는 리스크를 감당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당신들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당신들 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거라고 한 번 고민이라도 하게 만드는 것. 다른 호텔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응원이 온다.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2021년 세종호텔이 정리해고를 통보한 직원 15명은 모두 고씨가 지부장으로 있는 세종호텔 노조의 조합원이었다. 와해된 노조의 지부장으로서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고공에 올랐지만, 한 명의 일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평범한 사람들도 회사라는 저 거대한 힘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다. 고진수씨가 고공농성을 시작한 지 89일째가 되는 지난 5월 12일 오전 9시, 그의 고공 농성장을 찾아 24시간을 보냈다.

사다리를 오르자 높이 140㎝, 폭 80㎝의 하늘 움막에 몸을 구기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면 삭발한 머리, 검게 그을린 얼굴, 깎지 않은 콧수염은 한층 위압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가 머무는 지하차도 진입 차단 시설은 명동역 앞 왕복 6차선 도로 중 2개 차로 위에 세워진 10m 높이의 철제 구조물이다. 그는 지난 2월 13일 이곳에 올라와 합판 등으로 길고 비좁은 터널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언제 내려갈지 알 수 없고, 눈·비는 수시로 내렸기에 지붕까지 세웠다.
키 183㎝, 몸무게 80㎏의 고씨로서는 이 좁은 공간에서 온전히 몸을 쭉 펼 수 없다. 양반다리를 하고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힘들었다. 몸을 펴지 못하니 고공에 올라간 지 몇 시간 만에 무릎과 허리부터 뻐근함이 느껴졌다. 고씨는 “90일쯤 되니 팔꿈치, 무릎, 고관절이 아프다”고 했다. 다리를 쭉 펴고 마주 앉자니 거리가 멀어져 밑으로 지나가는 차 소리가 말소리를 묻었다. 이따금 지하차도로 큰 차들이 진입할 때마다 철제 구조물 전체가 흔들리며 진동이 온몸으로 전달됐다. 그때마다 땅에서 바라봤던 이 구조물의 철망으로 된 바닥 면이 생각나 혼자 몸서리쳤다. 고씨가 “바닥 철망이 용접한 건데 용접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용접 한 방에 1t을 버틴다더라”고 말했다. 안심은 되지 않았다.
이 움막의 양쪽 끝에는 성인 남성 두 명이 간신히 서 있을 만한 공간이 있다. 시민들이 농성장을 방문하면 고진수씨는 여기 서서 북을 치고 손을 흔든다. 그곳에 서면 그가 20년을 몸담았던 세종호텔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한창일 당시 ‘포스트 아포칼립스(멸망 이후)’ 세계를 그린 영화처럼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던 서울 명동 거리는 지금은 활기를 찾았다. 코로나19 이전처럼 세종호텔 앞은 관광버스나 택시가 정차해 있고, 돌아온 관광객들이 트렁크를 끌고 지나간다. 고진수씨와 그의 동료들만 그대로 황량한 세계에 남았다.
2021년 연말 세종호텔은 고씨 등 12명을 경영 악화를 이유로 정리해고했다(대상자 15명 중 3명은 희망퇴직). 법은 정리해고를 하려면 해고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규정은 굉장히 무거워 보이지만, 법원에서는 ‘해고를 피하기 위한 절차들을 거쳤는가’로 한결 가벼워진다. 고씨 등은 해고가 부당하다는 소송을 제기했는데 법원은 1심부터 최종심까지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예컨대 세종호텔은 2020년 한 차례 정부에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해 유급 휴직을 시행하고 임금을 삭감했으며, 이듬해까지 6차례에 걸쳐 희망퇴직 공고를 냈다. 법원은 해고를 피하려는 절차는 거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노력을 다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당시 세종호텔은 고용유지지원금 우선지원대상기업으로, 노동자의 휴직 기간 임금에서 10%만 부담하면 되는 상황이었음에도 2021년에는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하지 않았다. 고씨 등이 회사 부담분 10%마저 반납하겠다며 고용유지지원금 신청을 설득했으나 회사는 끝내 하지 않았다.
당시의 해고는 ‘긴박한 경영상 필요에 의한 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이뤄졌지만, 그 본질은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한 구조조정이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지고 있다. 세종호텔의 각종 지표가 보여준다. 세종호텔의 객실 매출은 2022년 38억원, 2023년 92억원으로 회복세를 보이더니 2024년 123억원으로 코로나19 이전 수준(2019년 108억원)을 뛰어넘었다. 반면 총매출에서 인건비(용역비 포함)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14.5%에서 2024년 11.88%로 하락했다. 이미 2019년에도 서울 호텔 평균(33.36%)보다 낮았던 인건비 비중이 바닥을 모르고 추락 중이다.
2011년 270여명의 직원이 일하던 세종호텔은 현재 정규직 21명만이 근무하고 있다. 코로나19 시기 용역업체에 맡긴 객실 청소, 시설 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인력을 합쳐도 60여명 수준이라고 한다. 333개 객실을 운영하는 호텔치고는 적은 숫자다. 고씨 등의 부당해고 재판에서 세종호텔 측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영 악화로 최소 근무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해고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회사가 산정한 최소 근무 인원은 26명이었다. 그런데 감염병 종식 이후 업무가 훨씬 많아졌음에도 회사는 위기 때 정한 최소 근무 인원보다 더 적은 인원으로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세종호텔의 직원 급여는 6억원으로 2019년(16억원)의 40% 수준에 불과했다. 반면 지난해 용역비는 2019년보다 5000만원 늘어난 8억7000만원으로 직원 급여보다 많았다. 고용은 줄이고 하청을 늘리는 구조조정이 재난을 기회 삼아 완성된 셈이다.

2021년 정리해고자들은 모두 민주노총 산하 세종호텔노조의 조합원들이었다. 호텔에 손님이 끊기자 회사는 사무실에서 객실 손님들의 요구사항을 접수하는 ‘오더테이커’와 객실 청소 등을 하는 ‘룸메이드’, 프런트 직원 일부를 호텔 조찬 등을 제공하는 식음료 사업부로 배치했다. 이들은 졸지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맡게 됐다. 이후 호텔은 식음료 사업부를 폐지하는 방식으로 해고를 단행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세종호텔노조 조합원이었고, 노조는 사실상 붕괴했다.
세종호텔에서 10년 넘게 지속한 노조 탄압과도 연결돼 있다. 고씨는 세종대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대양학원의 주명건 전 이사장이 2009년 세종호텔 회장으로 온 뒤 노동 조건이 역주행을 시작했다고 본다. 2004년 교육부는 감사를 통해 대양학원의 회계 부적정을 지적하고 개선을 권고했고, 이듬해 주명건 당시 이사장이 물러나면서 대양학원 이사진이 교체됐다. 세종호텔에도 새로운 대표가 왔다. 이 시기 노사는 세종대 교직원에 미치지 못한 세종호텔 직원 임금의 큰 폭 인상, 1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에 합의했다. 그러나 2009년 이후 합의는 무용지물이 됐다.
2011년 복수노조가 허용되며 노조 탄압이 본격화됐다. 세종호텔에는 ‘세종연합노조’라는 새로운 노조가 생겼다. 그해 초부터 호텔은 세종호텔노조 간부들을 부당 전보했다. 프런트 근무자를 호텔 커피숍 서버로 발령내거나 교환 근무자를 룸메이드로 발령했다. 특정 노조에 대한 불이익은 직원들에게 분명한 시그널을 줬다. 당시 직원 270여명 중 180여명이 세종연합노조에 가입했고, 세종호텔노조는 소수노조가 됐다. 사측은 소수인 세종호텔노조와는 대화도 하지 않으려 했다. 2012년 세종호텔노조는 부당전보 철회와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다.
파업 기간 고씨 등은 구사대로 나선 세종연합노조의 동료들과 쌍욕을 주고받고 몸싸움을 해야 했다. 한없이 사람 좋던 동료가 맞은편에서 대치하며 눈이 뒤집혀 폭발하는 걸 봤다. 파업이 끝나고 들어선 주방에서 파업에 참여한 부주방장을 후배 조리사가 안고 끌어냈다. 파업을 함께했던 동료 일부는 노조를 탈퇴하고 세종연합노조로 옮겼다. 세종연합노조는 대표 노조로 노사 협상에 나서 호봉제를 성과연봉제로 바꾸고, 탄력근로제를 도입하는 데 합의했다. 고씨 등은 세종호텔노조 소속이라는 이유로 몇 년을 다니든 진급을 못 했고, 기피 업무에 배치됐으며, 저성과자로 임금이 깎였다. 고씨만 해도 20년 차 평사원이다. 한때 조합원 수가 6명까지 줄었던 세종호텔노조는 2021년 호텔에 구조조정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근 10년 만에 다수 노조가 됐다. 어느 때보다 생존 문제가 커지자 당시 호텔 인력의 절반가량이 싸울 줄 아는 세종호텔노조로 넘어오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고씨는 “파업 당시에는 당연히 (맞은편에 선 동료들에 대해) 분노했다. 달관한 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해가 됐다. 그들에게는 호텔 일자리가, 직급을 유지하는 것이 생존의 문제만큼 큰 거였다. 나는 인간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사회 구조가 사람을 절박하게 하고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다고 본다. 복수노조가 되면서 회사는 (노조 중) 한쪽을 탄압하고 조금이라도 차별을 뒀다. 그렇다고 다른 쪽에 득이 있었던 건 아니다. 손해를 주지 않고 현상 유지만 했는데 말은 전보다 잘 들었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사람이 선의로 갈 수 있는 길을 협소하게 만들고 인간적 관계들을 단절시킨다”고 했다.
노조는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다투는 법정에서 세종호텔노조 조합원만 해고한 것은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정리해고 대상자를 정하기 위해 회사가 진행한 절차에 세종호텔노조 조합원들이 참여하지 않았기에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해고된 것이라고 봤다. 당시 교섭 대표 노조로서 세종호텔노조는 정리해고 이외의 대안을 찾자며 해고 절차 중단을 요구했다. 회사가 요구하는 대로 어학시험을 치고, 재산세 납부 내역, 가족의 소득 증빙 자료 등을 제출했다면 정리해고에 스스로 찬성한 것이 돼 법정에서 다퉈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회사는 서류 미제출자에게 최저점을 주는 방식으로 세종호텔노조 조합원들을 해고 대상자로 몰았다.
사다리를 올라간 오전 9시 직후부터 시작된 고씨와의 인터뷰는 밤 11시 잠자리에 들면서 끝이 났다. 주로 그가 얘기했는데, 저녁 8시 밥을 먹기 위해 잠시 멈춘 것을 제외하고는 쉼 없이 계속됐다. 90일째 웅크리고 생활하다 보니 소화가 안 돼 점심은 먹지 않는다고 했다. 허리와 무릎의 통증이 점점 심해져 어느 순간부터는 엎드려서 그의 말을 받아 적었다. 그는 한없이 길어지는 인터뷰에 대해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거 아니니 얼마든지 괜찮다”고 했다. 그는 고공에 오르기 전에도 오랜 기간을 싸워왔다. 2013년부터 목요 집회를 9년간 빠짐없이 했고, 해고 이후 3년간은 호텔 앞 농성장을 지켰다. 10여 년간 한 번이라도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면, 그런 사람이 많았다면 그가 고공에 오를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인터뷰 종료를 통보하자마자 곧장 잠들었다. 그가 잠들고 한참 동안 차 경적, 어느 가게에서 자정까지 틀어대는 K팝 음악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큰 차가 지나가고 구조물이 흔들릴 때마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고씨가 고공에 올라오기 전 콜센터에서 해고된 노동자 A씨에게 들었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A씨는 해고 직후 부당함을 느꼈지만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떠오른 건 출퇴근 길에 종종 봤던 세종호텔 해고자들의 농성이었다. A씨는 피켓을 만들고 자신의 회사 앞에서 싸움을 시작했다. 지난 5월 13일 오전 8시 고씨는 철제 구조물 끝에 올라 명동 거리를 향해 확성기를 쥐고 말했다. “어떻게 세상이 바뀝니까. 우리가 바뀌어야 합니다.” 고씨는 오늘도 고공에서 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