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하, 그리고 문상길

2024-09-18

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1987년 6월 항쟁 당시, 사회과학전문지 ‘녹두서평’ 창간호(3월)에 이산하의 장편서사시 ‘한라산’이 실렸다.

이때만 하더라도 4·3은 금기였다. 4·3은 폭동이었고 제주도민은 폭도였다. 당시 공안당국은 이 시인을 두고 용공시를 쓴 용공시인으로 규정했다. 이 시인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전국 수배 끝에 체포돼 1988년 징역 1년 6개월,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이 시인은 지난 2021년 12월 ‘과거사정리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진실위는 진실규명 신청 3년이 된 2024년 9월 6일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진실위는 당시 공안당국이 이 시인에 대해 불법 구금, 가혹행위 등 중대한 인권 침해를 가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당시 사건 담당 공안검사는 황교안 전 국무총리였다.

‘4·3특별법’은 1999년 12월 정기국회에서 통과돼 2000년 1월 제정 공포됐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이다. 이보다 훨씬 앞선 1987년 3월에 이 시인은 4·3을 말했다. 4·3 당시 미군정과 경찰의 초토화 작전을 말했고 수많은 제주도민 학살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제주4·3의 실상을 알렸다고 구속돼 폭행과 구타, 물고문당했다. 누구도 말하지 못하던 시절, 침묵을 강요한 군부독재 시절이었음에도, 그가 4·3의 진실을 알렸다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인권 침해 사실은 37년이 지나서야 인정받았다.

이 시인은 정신과에 다니며 약을 계속 먹어야 했지만, 인권침해 사실이 인정돼 다행이라며 고문과 가혹행위가 자행된 다른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도 제대로 이뤄졌으면 한다고 했다.

살다 보면 어쩌다 이산하 시인을 대면할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선뜻 다가가진 못 할 것 같다. 그렇지만 소리 내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다음은 1948년 8월 14일 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서 보도한 “박 대령 암살 제4회 공판”이란 제목의 기사이다.

“나는 김익렬 중령의 동족상잔을 피하는 해결 방침에 찬동했으며 처음으로 김달삼을 만난 이유는 김 중령과 회견시키기 위해서였고.” …(중략)… “심리 조서에 서명 날인한 것은 전기고문 끝에 눈을 막은 후 조서에 대한 기록내용 여하를 모르고 강제적으로 무조건 날인한 것으로 이 법정에서 진술한 것이 진실이라고 굳게 그 조서 날인에 대해 부인했다.”

이 재판 이틀 후인 8월 14일 공판에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사형이 각각 언도됐다. 그리고 한 달 후인 9월 23일에 사형이 집행됐다.

언론보도에서 확인되듯 박진경 연대장 저격 사실은 인정했다. 그런데 저격 동기는 박진경 연대장의 무조건적 공격으로부터 제주 도민의 희생을 막겠다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등 아홉 명의 군인들에게 묻고 싶다.

“그때의 소신은 여전히 변함없습니까?”

그리고 오늘날 ‘제주4·3직권재심합동수행단’의 판결은 어떨지 매우 궁금하다.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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