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에세이 ‘훌훌 훨훨’] 우아한 太白

2025-02-27

太白 클 태와 흰 백을 쓰는 도시 태백에 하얀 눈이 내리는 날 우린 그곳에 있었다. 검은 산은 하얗게 덮이고 역동적인 산업의 중심에서 대단했을 위용은 골목 끝에 숨었다. 태백은 작년에 마지막 광산이 폐광되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수십 년 광부와 검은 광산의 태백을 기록해온 타큐멘터리 사진작가 박병문 선생님과 인연이 있어 울산의 몇 사진작가들과 태백 여행을 갔다. 폐광이 되기 수 년 전부터 가자, 가자, 미루어졌던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채굴되어 산을 뒤덮고 있는 석탄을 나르느라 트럭들이 비탈길을 오르고 내리는 모습도 보였다.

첫날 굽이굽이 눈 쌓인 1300m 만항재 고갯길을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처럼 달리는 박병문 작가가 운전하는 차에 탄 우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얼마나 간절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저리 겁이 없이 달릴까. 잠시 생각했다. 사명이라고 여기신다 했던 말씀이 생각났다. 세상에서 이루고 가야 할 단 한 가지 아버지를 기록하는 일, 상처로 가득 찬 태백을 세상에 알리는 일, 삶의 가장 바닥에서 본 것은 절망이 아닌 희망의 빛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일, 그것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가 가진 사명이자 열정일 것이다.

부모님이 목사였던 고흐가 벨기에의 광산마을에 전도사로 취직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참담함을 보고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을 먹었다. 광부들과 친하게 지내던 고흐를 교회 측에서 좋게 보지 않아 전도사 일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검은 탄광 속에서 사람들이 품었던 빛 한 가닥의 희망을 그림으로 그려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그린 그림 중 ‘석탄 자루를 이고 가는 광부의 아내’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태백에도 여성 광부들이 있다는 것을 박병문 선생님의 ‘검은 장미’라는 전시로 알게 되었다.

‘선탄부’라고 남편이 광산에서 일을 하다가 사고로 죽었을 때 회사에서 부인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세 자녀까지 대학을 무료로 지원해주는 복지가 그나마 있어서 남편을 죽게 만든 지긋지긋했을 광산에서 부인들이 뒤를 이어 일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여성 광부들은 땅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석탄이 땅속에서 굴 밖으로 실려 나가는 레일 곁에서 탄석을 줍거나 부스러진 잔해 속에 쓸 만한 석탄을 골라내는 일을 했다. ‘선탄부’의 기록 사진은 여성들인지라 조심스러웠을 테지만 사람들은 박병문 작가의 진심의 알았기에 모두 흔쾌히 사진 작업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사진에서 본 그녀들은 환한 일상의 여느 아낙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 폐광이 되고 선탄부 여성 광부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여쭈었더니 편의점도 하고 식당도 찻집도 하고 잘 지내고 있으시다는 안도의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언젠가 내가 사는 울산에서 ‘물닭 볶음탕’이라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있다. 자박하게 끓이는 것이 아니라 국물이 흥건해서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끼리 고개를 갸우뚱했던 적이 있다. 그 물닭 볶음탕을 태백에서 만났는데 원조가 그곳이었다. 돼지고기는 비싸서 먹지 못하고 종일 탄가루 속에서 숨을 쉬며 거칠어진 목을 비교적 가격이 저렴했던 닭고기로 매운탕처럼 끓여 먹었다는 것이다. 일행들은 국물을 남김없이 다 먹고 밥까지 볶아서 맛나게 먹었지만 아버지와 광산 일을 함께했던 박병문 작가는 물닭 볶음탕을 잘 드시지 않았다.

2박 3일의 태백 여정에서 우리가 본 것은 천만분의 1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방 소멸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살펴보아야 할 귀중한 서사를 가진 도시가 많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운탄고도 등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눈꽃 축제 등 여러 행사를 기획하는 태백이지만 최초의 관사 등 귀중한 탄광의 역사를 가진 건축물들이 개발이라는 명복으로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다녀와서 태백의 박병문 작가와 동행했던 여정을 작은 전시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함께하고 싶어 전시를 기획했다. 박명문 작가의 온빛 다큐멘터리 대상 수상작과 류가헌 전시 ‘아버지의 그늘’ 작품들을 열람할 수 있게 준비를 하셨고 나머지 작가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본 태백의 모습을 다섯 점씩 출품했다. 전시 제목은 <우아한 太白> 대설주의보가 내렸던 태백, 눈 폭풍이 불어 안개처럼 눈이 산을 훑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우아~’라는 단어를 백 번은 더 외친 것 같았다. 더 이상의 보탤 말도 더 이상 뺄 말도 없었다. 우아한 태백이다.

오프닝에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다녀가신 뒤 전시 소회를 적어 보내주시거나 SNS에 올린 분들의 글 중에 인상적인 두 분의 글을 발췌해 소개해 본다.

울산공단 이주 정책으로 장생포의 애환을 가진 김구한 교수님의 글이다. “세 분의 사진들은 눈에 좀 익었다. 몇 차례 사진을 본 결과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박병문 작가의 사진이다. 20여 년간 태백만 집중적으로 찍었단다. 사진을 보는 순간 작은 울림이 전해 온다. 두 가지 마음이 교차된다. 따뜻함과 서러움이다. 고향마을의 풍경을 보는듯하여 따뜻하다. 사진은 산촌의 풍경이지만 내 고향 어촌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내 그 감정은 서러움으로 바뀐다. 태백은 탄광촌으로 출발했지만 내 고향은 평화롭고 풍요로웠던 어촌 마을이었다. 화력발전소가 들어오면서 온 동네가 탄광촌과 비슷하게 검은 분진이 마을을 뒤덮었다. 빨래를 제대로 널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냄새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풍경들이 떠오르니 서럽다. 탄가루로 이어진 감정은 가슴 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태백이나 내 고향이나 탄이 우리네 삶을 이렇게 갉아 먹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막장 인생으로 끝난 태백과 탄가루로 살지 못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내 고향마을. 한 장의 사진이 이어 준 묘한 감정이다. 사진의 주는 힘이다.”

지역 신문사 37년 동안 사진기자로 재직하시고 퇴직하신 임규동 이사님도 글을 남겼다. “태백이란 것이 눈이 많아서 큰 하얀 것만이 아니다 라는 것을 전시 흑백사진을 보고 느꼈다. 사진 인생 평생 처음 보는 전시였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처럼 이 전시장을 대신 설명해주는 말이 있을까 싶다. 사진 전시장은 딱 학교 골마루 끝에 있는 신발장 네 칸 크기다. 생텍쥐페리가 설파한 ‘더 이상 보탤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란 말이 있다. 완벽한 줄임 생략함 그리고 덜어냄의 미학이 오롯이 네 칸 신발장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것에 감동했다. 태백은 하양과 까망이 공존하는 곳이다. 하양이 지표면 위의 눈이라면 까망은 지표면 아래 검은 석탄이다. 하양이 땅 위의 삶이라면 땅 아래는 검은 죽음일 수도 있다. 삶과 죽음이라고 극단적으로 구분지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검은 석탄이 있는 땅속은 죽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을 위해 몸부림쳤지만 종국에는 갱도가 무너졌을 수도 있고 진폐증으로 가쁜 숨을 쉬다가 이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작품들 중에서 최영실 작가의 작품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팻시티처럼 환부를 단면으로 촬영한 듯한 ‘잘려 나간 집’ 사진이다. 삶과 죽음의 시와 공을 사진 하나에 오롯이 녹여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편일률의 이발소 그림 같은 사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지금, 이런 심상적인 사진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꽃보다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진도 좋고 사람들도 좋다. 37년 노가다 사진 찍사에서 이제 슬슬 작가가 되어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게 만든 작가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이번 여정은 눈이 내리지 않는 남쪽 지역의 사람들이 마음에 담고 있던 눈 내리는 마을을 그리워해 단순하게 떠난 여행이었다. 전시는 그 후의 이야기다. 전시 작품을 목적으로 떠났다면 온전하게 아름다운 태백의 그림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 태어난 곳, 시간과 공간을 넘어 상처와 삶 그리고 희망을 생각해보게 하는 공감이 되었으면 한다.

이제 더는 탄광의 삶이 상처로 회자되거나, 위태했던 생의 끝 막장이라 불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상으로 터전을 옮긴 그들의 삶이 우리가 태백에서 만났던 빛 속에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걷는 내내 우아, 우아, 우아, 감탄사를 연발하며 셔터를 눌렀다. 우리가 본 것은 다만 검은 대지를 하얗게 뒤덮으며 흩날리는 눈이었다. 과거가 담긴 미래의 우아한 太白이었다.

최영실 포토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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