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친한 기자가 전화로 물었다. 새 정부의 경제정책으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즉각 ‘규제개혁’이라고 답했다.
내가 망설임 없이 곧바로 답한 까닭은, 지난주 대학 동기 모임에서 같은 주제로 토론을 벌였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을 연구하는 모 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국가투자전략청을 설립하고 공공자금을 신산업에 투자해 유망 기업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K엔비디아 육성론이다. 통상 분야 국책연구원장을 지낸 친구는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에 부응하는 통상·산업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위 신중상주의이다. 나는 제대로 된 규제개혁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신자유주의가 극성이던 시절(불과 얼마 전이다)에는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게 최선의 경제정책이라고 여겼다. 이제는 정부가 앞장서서 성장을 견인하는 새로운 국가 주도 성장전략이 부상하고 있다. 국가 주도 성장을 대표하는 중국이 까마득한 후발주자로 출발해서 첨단산업의 선두주자가 됐고 시장경제의 대부 격인 미국마저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주창하는 형편이니, 경제 성장의 패러다임이 바뀔 만도 하다.
‘성장 위한 규제개혁’ 모두가 공감
시대와 여건에 따라 성장전략의 방향과 내용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시장경제의 플레이어(참가자)는 기업이고, 정부는 게임의 규칙 제정자이자 심판이라는 점이다. 참가자들이 각자 기량을 맘껏 발휘하고 그 과정에서 더욱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합리적이고 공정한 규칙 제정 및 심판. 이게 시장경제에서 가장 기본적인 정부 역할이며 규제개혁의 목적이다. 신산업은 초기에 한 걸음 앞서는 것이 이후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는 데 결정적일 수 있다. 초반에 앞서 나가려면 자금 지원도 필요하지만, 기업들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경제사를 훑어보면 잘못된 규제가 신산업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뒤처진 사례는 무수히 많다. 산업혁명의 선두주자였던 영국이 자동차 산업에서 독일에 뒤처진 이유가, 마차를 몰던 마부의 일자리 보전을 위한 붉은 깃발법(자동차가 주행하려면 그보다 몇십m 앞에서 기수가 깃발로 주의 신호를 보내야 하며, 최고 속도를 시내 3.2㎞, 교외 6.4㎞로 제한) 때문임은 잘 알려져 있다. 굳이 그 옛날의 해외 사례를 들 필요도 없다. 타다 금지법 논쟁, 세포·유전자 치료제 허용 논란, 빅데이터 산업화와 개인정보 보호의 충돌 등 최근의 우리 사례도 만만찮다.
어느 정부가 출범하든 주요 경제정책 과제로 규제개혁을 내세웠고, 나름대로는 이를 위해 애썼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규제가 경제 혁신과 신산업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 그래서 ‘개혁’이 시급하다는 데는 모두가 이구동성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종종 한은 업무 영역을 넘어선 발언을 하지만 거의 옳은 말이기에 권위를 인정받는다. 그는 올해 초 한국 경제 현실을 평가하면서 “정부가 가장 뼈아프게 느껴야 할 것은 10년간 신산업이 도입되지 않았다는 점”이라며 “창조적 파괴 속에 누군가는 고통받기 마련인데 이것저것 피하다보니 신산업이 하나도 도입되지 않았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창조적 파괴 속에 누군가는 고통받는 것’이 규제개혁이 힘든 근본 이유다. 대체로 규제를 통해 보호하려는 것은 기존 이익이며, 개혁으로 얻게 되는 것은 미래 이익이다. 양쪽 이해관계 집단이 팽팽해도 개혁은 어렵다. 하물며 기존 이익을 지키려는 집단은 거세게 저항하지만, 미래 이익은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탓에 악착같은 요구가 없다면?
부적절한 규제가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말은 예전부터 해왔고, 실제로 그렇기는 했다. 그래도 그로 인한 폐해가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대학가에는 챗GPT 작성 리포트가 만연하고 일상에서는 챗GPT 사진 꾸미기가 대유행이다. 인공지능(AI)·로봇·바이오 등 신산업은 발아기를 거쳐 열매를 맺으려 한다. 이들이 경제와 사회를 얼마나 어떻게 바꿔놓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뒤처지면 돌이키기 어렵다는 데는 대부분이 동의한다. 이제는 제대로 된 규제 체계를 갖추는 것이 우리 경제 절체절명의 과제가 됐다.
어찌하면 새 정부가 규제개혁에 성공할까를 궁리하다보니 20여년 전 전자정부 구축 과정이 떠오른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단시간에 성공적으로 전자정부를 구축했다. 그 덕에 우리는 정보화에서 다른 나라보다 앞섰고 정보기술(IT) 강국이 될 수 있었다.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은 대통령의 관심이었다. 정보화에 진심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은 컨트롤타워로 전자정부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다. 매주 회의에 청와대 비서관이 참석하게 했고, 결과를 보고받아 진척도를 확인하고 애로사항을 해결했다.
이번엔 국회 협조로 반드시 성공을
이번에는 규제개혁을 훌륭히 해내어 AI를 비롯한 첨단산업 강국이 됐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대통령이 관심을 두고 챙기는 게 필수다. 단, 규제개혁 성공에는 하나가 더 필요하다. 국회의 협조다. 규제개혁에는 이익집단의 반발이 거세고 갈등이 첨예하다. 또한 중요한 사안은 대부분 법률을 만들거나 고쳐야 한다. 갈등 조정과 법률 제·개정은 국회 역할이다. 혹자는 민주당이 집권하면 행정과 입법을 모두 차지하니 견제와 균형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다. 충분히 일리 있는 걱정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다. 지금의 위기 상황을 헤쳐나가려면 행정부와 국회의 협조가 절실하니 말이다. 만일 국민의힘 또는 개혁신당이 집권한다면? 그럼, 행정부와 국회가 대승적 차원에서 난국 타개에 협조하길 바랄 수밖에.
노파심에 하나만 덧붙이자. 규제개혁이 규제 완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혁은 기존의 것을 새롭게 바꾼다는 의미이며, 여기에는 완화뿐만 아니라 신설과 강화도 포함된다. 기반이 든든해야 그 위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법이다. 산업 발전의 든든한 기반을 만드는 것, 이게 규제개혁의 본래 목적임을 잊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