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퇴→농사→42세 유학→수석 졸업 "쓸모 묻지 말고 공부하라"

2025-04-22

농사꾼에서 우주공학자 된 공근식 박사 인터뷰

'무엇인가' 시리즈로 이름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에세이집 『공부란 무엇인가』(2020)에서 내린 공부 정의다. 이를 적용하자면, 악명 높은 '7세 고시'나 '의대 쏠림'으로 유명한 한국은 무엇을 왜 공부하는지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교육열이 높다기보다 오히려 교육에 냉담한 사회다. 김 교수가 "(입시·취업을 위한) 수단화된 공부 말고 특별한 목적 없이 공부하는 게 진짜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배경이다.

공부 싫어 자퇴, 유학 중엔 퇴학

노벨상 배출 명문서 수석 졸업

인생 반전엔 "더, 더, 더" 정신

무작정 "가르쳐달라" 매달렸다

좋아서 한 공부가 주는 울림

하지만 이런 주장은 현실에선 물정 모르는 한가한 소리일 뿐이다. 2022년 한 조사에 따르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 거부감이 커져 초등학교 6학년이면 벌써 열에 여섯(62%)은 '공부가 싫다'고 한다. 어렵고(49%), 부모 강요로 억지로 해야 하기 때문(16%)이다. 김 교수 식 표현으로, 입시와 취업으로 환원되지 않는 공부할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들의 슬픈 자화상이라 하겠다.

그런데 여기, 한국 사회 대다수 학부모와 학생들이 그러하듯 공부를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더 알고 싶고, 배우는 게 재밌어서"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 두 동생이 대학 가고 취업하는 동안 본인은 공부가 싫어 고교 중퇴 후 마흔 살 되도록 고향에서 수박 농사짓던 공근식(55) 박사 얘기다. 너무 드문 사례라 TV 뉴스와 예능 프로그램까지 그를 다뤘다.

그도 그럴 것이 검정고시로 딴 고교 졸업 자격증 하나 달랑 들고 마흔둘에 덜컥 낯선 러시아 유학을 떠난 것만도 놀라운데, 숱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러시아 최고 학교(모스크바 물리기술원·MIPT)에서 10년 만에 우주항공공학 박사를 땄으니 경이롭다는 말도 부족하다. 이 모든 게 공부의 쓸모를 따지기는커녕 학위 욕심이나 취업, 심지어 결혼 생각도 없이 그저 하나라도 더 배우려다 이뤄낸 일이었다.

공 박사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난 2022년 귀국한 후 이번 학기부터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박사 후 과정과 양자역학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지난 18일 서울 성대 국제관에서 '무용한' 공부에 인생을 건 사연을 듣고,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두 번의 자퇴

내륙이지만 강물에 둘러싸여 섬 같은 금강 상류 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가 고향이다. 부모님은 여기 국유지 빌려 수박 농사를 지었다. 공부가 싫었던 난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농사나 짓자. "

다행히 재능이 있었다. 초강리 수박이 원체 당도 높기로 유명했지만 내가 키운 수박은 더 크고 달아 더 비싸게 팔았다. 농업기술센터의 농민 후계자로 뽑힐 만큼 성실하기도 했다. 4500평(1만5000㎡) 하우스에서 매년 12월 중순 수박 모종을 키워 이듬해 6월 시장에 내보내면, 곧바로 알타리무를 파종해 두 번 더 수확했다. 이렇게 1년에 세 번 농사지어 우리 식구 먹고살고 동생들 공부할 돈을 벌었다.

인생 변곡점은 우연히 왔다. 스물여덟이던 1998년 수박 출하하러 갔다가 대전역에 붙은 야학 안내문을 보고 홀리듯 공부를 시작했다. 카이스트 물리학과 박사 과정 학생들이 자원봉사 교사였는데, 농사일 마치면 기차 타고 대전으로 달려가 야학 원래 취지인 검정고시 준비 아닌 물리와 수학에 매달렸다. "더 가르쳐주세요. 더더더. "그렇게 5년을 더 배웠다. 야학 선생님들 졸업에 맞춰 고졸 인정 검정고시 자격증을 땄다. 내친김에 수능까지 봐서 배재대 전산전자물리학과(현 전기전자공학과) 04학번이 됐다.

인복을 타고났는지 여기서도 여러 은인을 만났다. 전산전자물리학과 박종대 교수, 화학과 교환 교수로 온 고려인 김용하 교수, MIPT에서 온 러시아 박사, 그리고 충남대 물리학과 박병윤 교수, 그리고 함께 강의 들으며 아무 대가없이 나를 도와준 학생들이다.

가령 김 교수는 석탄에서 부식산 추출해 액체비료 만드는 연구를 했는데, 내 무밭에서 실험하면서 러시아어 등 여러 도움을 줬다. MIPT에서 온 박사를 졸라 빈 강의실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 물리 강의를 들었다. 러시아어·영어 모두 서툴렀지만 수식 보고 눈치로 배웠다. 결정적 은인은 박종대 교수다. 이런 내 공부 열정을 눈여겨보곤 이듬해 카이스트 물리학과에서 청강하도록 도와줬다. 그런데 너무 어려웠다. 무작정 충남대 물리학과에 가 불 켜진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박병윤 교수 방이었다. "카이스트 청강생인데 물리학 수업 듣게 해달라"고 했더니 기꺼이 허락했다. 카이스트 수업 마치면 곧바로 충남대에 가 진도가 좀 느린 비슷한 수업을 들었다.

3학년부터 수업이 물리 아닌 컴퓨터 위주길래 휴학하고 카이스트와 충남대 청강에 집중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번엔 공부가 좋아서 한 중퇴였다.

한 번의 퇴학

배우는 게 좋았을 뿐, 유학은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런데 2010년 태풍 곤파스가 모든 걸 바꿔 놓았다. 심각한 침수 피해가 나자 수자원공사와 영동군청은 주민에게 보상금 주고 수박 농사를 그만 짓게 했다. 계속 농사지으려면 인근에 다른 땅 사고 하우스 세워야 했는데, 하필 기획 부동산이 기승을 부려 평(3.3㎡)당 6만원 하던 땅값이 10만원 넘게 치솟았다. 타산이 안 맞았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 대신 나와 둘이 농사짓던 어머니한테 말했다. "러시아 가겠다. "

위대한 항공학자 니콜라이 주코프스키(1847~1921) 이름을 딴 모스크바 인근 주코프스키 시에 위치한 MIPT는 안드레 가임 등 노벨상 수상자 10여 명과 미르·국제우주정거장(ISS)에 769일 체류했던 알렉산드르 칼레리 등 숱한 우주비행사를 배출한 항공우주 인재 양성의 산실이다. 수학·물리·화학 고교 내신으로 신입생을 뽑는데 다행히 이 과목 검정고시 성적이 좋았다. 마흔둘이던 2012년 일단 예비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운 후 물리공학과에 입학했다. 아무리 예비학교를 통과했어도 수업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칠판 위 수식 보고 어찌어찌 공부했지만 컴퓨터 없던 컴맹이라 인터넷 공지를 놓치는 통에 시험을 아예 못 보고 1학기 만에 퇴학당했다.

유학 당시 전 재산이 5000만원쯤. 아무리 연 500만원 정도로 학비가 싸다지만 부모 봉양은커녕 집 재산 까먹으며 유학 가는 나를 동네 어른들은 무책임하고 형편없다고 욕했을 거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응원해줬는데, 이런 사실을 차마 털어놓을 수 없었다. 러시아어를 좀 더 배워 곧 돌아갈 거라고 거짓말했다. 속으론 "농사나 짓자" 했다.

몇 달 지났을까. 러시아 국가 훈장을 여럿 받은 이론물리학 석학 세르게이 파블로비츠 알릴루예프 명예교수(1928~2017)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이 교수의 양자역학 수업을 청강하며 시험도 봤는데 성적이 좋아 교수 기억에 남았던 모양이다. 내가 보이지 않자 자기 제자인 총장을 설득해 재입학 기회를 준 거였다. 다만 같은 과는 못 가고 항공우주공학과에 들어갔다.

1, 2학년은 여전히 언어가 문제였지만 성적은 꽤 좋았다. 오전 9시 시작하면 밤 9~10시까지 수업하고, 금요일에 내준 과제 하느라 주말 내내 공부했다. 어린 러시아 천재들도 버거운 수업이라 더 이 악물고 했다. 다행히 귀가 트인 3학년부터 전 과목 A 플러스 받아 외국 유학생으로는 드물게 국가장학금에다 생활비까지 넉넉히 받았고, 수석 졸업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쓸모없고 쓸모있는 박사

화성 탐사선이 대기권에 재진입할 때 폭발 없이 무사한 착륙을 돕는 극(極)초음속 연구는 국방 관련 예민한 분야라 유학생에겐 기회를 잘 주지 않는다. 그런데 받아준다니 향후 진로니 뭐니 따지지 않고 "무조건 하자" 했다.

수박 농사짓다 뒤늦게 우주공학 공부하는 내 사연은 한국뿐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화제였다. MIPT 학술지와 현지 언론에 소개된 덕분인지 학교 측은 한국 행 비행기 표까지 사주며 각별히 챙겼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가령 박사 과정 때 주 1회 열리는 세미나에서 조금이라도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 참석이 막혔다. 심지어 지도 교수 논문도 공유 못 받기 일쑤였다. 외부 발표는 검열을 거쳤다. 단기 프로젝트로 온 MIT 박사 과정 학생과 기숙사 한방을 쓴 적 있는데, 미국 역시 극초음속 분야는 외국 유학생에게 잘 개방하지 않는다고 했다. 상관없었다. 러시아에 남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다. 박사 후 과정(포닥)을 가려 했지만, 한국이 대러시아 경제 제재에 동참해 러시아의 비 우호 국가로 분류되면서 어그러졌다. 유럽판 나사(NASA)인 유럽우주국(ECA)이 러시아와 화성 탐사선을 공동 개발하며 MIPT 실험실로 들어오던 적잖은 연구비가 끊긴 영향도 컸다. 코로나 와중에 급성 폐렴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임종도 못 지키며 그해 8월 박사 학위는 받았지만, 10월 귀국해야 했다.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은 햇병아리가 혼자 덩그러니 한국에 떨어졌다.

지금껏 요양병원 계신 아버지 돌보며 고향 집에서 혼자 논문 쓰고 있다. 발사체 시뮬레이션을 위해 컴퓨터를 1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끄지 않고 계산 프로그램을 돌려 첫 논문은 완성했고, 두 번째 논문 작업 중이다. 야학부터 아무런 계획 없이 그저 새로운 걸 알게 되는 게 재밌어 공부했다. 그런데 생애 처음으로, 외국 유명 학회지 등재라는 특정 목표가 생겼다. 논문을 계기로 러시아에서 멈춘 공부를 미국이나 유럽에서 이어가길 희망해서다.

성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김장현 교수 제안으로 하는 시간강사가 지금 한국에서 내 지식을 활용하는 유일한 통로다. 한국우주항공청(KASA)의 화성 탐사선 계획이 20년 뒤인 2045년에나 잡혀 있는 만큼, 내 지식은 당장 쓸모가 없다. 또 곧 정년퇴직할 나이라는 현실의 벽 탓인지 관련 연구 기관 취업도 쉽지 않다. 한마디로 연구는 너무 앞섰고, 나이는 너무 먹었다. 괜찮다. 당장 써먹을 수 없는 공부면 어떤가. 공부하다 보면 또 뭔가 일어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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