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디 위에서 나이 든 노인들이 천천히 걸으며 짧은 패스를 주고받는다. 걸음도 느리고 패스도 느리지만 눈빛은 누구보다 진지하다. 공을 향한 열정만은 젊은이 못지않고 한차례 슛과 패스에 진심이 담겨 있다. 골이 들어가면 노인들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는다. 벤치에서도 뜨거운 박수가 쏟아진다. 70세를 훌쩍 넘긴 영국 노인들이 축구하는 장면이다. 영국 매체 가디언은 19일 “잉글랜드 70세 이상 대표팀은 스페인에서 열릴 ‘월드 네이션스 컵’을 앞두고 마지막 훈련 경기를 마쳤다”며 ‘워킹 풋볼’팀을 소개했다.
‘워킹 풋볼’에서는 달리면 반칙이다. 노인들은 짧은 패스를 주고받고, 서로 움직임에 고함을 치며 공간을 메운다. 심지어 한 선수는 상대 팔을 잡아 골 찬스를 막았다가 ‘레드카드’를 받았다. 경기 공식 규정 대로 달려도 안되고 달릴 수도 없는 나이. 그러나 경기장 분위기는 느긋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남자 70세 대표팀 감독 개러스 루이스는 “대부분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경쟁적이고, 얼마나 체력적으로 힘든 경기인지 모른다”며 “공이 굉장히 빠르게 움직인다. 달리진 않지만, ‘축구’ 본질은 그대로 살아 있다”고 말했다.
워킹 풋볼은 2011년 영국 체스터필드 한 지역 프로그램에서 태어났다. 노년층 남성들이 건강을 되찾고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잉글랜드 60세 이상 대표팀을 이끄는 스튜어트 랭워디 감독은 “처음엔 단순히 ‘은퇴자들의 운동’이었는데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목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현재 영국에는 지역 리그, FA컵, 국가대표 시스템, 국제대회까지 완비된 ‘워킹 풋볼 생태계’가 존재한다. 20일 스페인에서 개막한 이번 월드 네이션스 컵에는 30여 개국에서 70개 팀이 참가한다. 지난해 잉글랜드 세인트 조지스 파크에서 열린 초대 대회에는 17개국, 28개 팀이 참가했고, 잉글랜드가 50세·60세 부문에서 모두 우승했다. 올해 대회에는 남자 70세 이상 부문과 여자 40세·50세·60세 부문이 신설됐다.

지금 영국 내에서만 약 10만 명이 정기적으로 워킹 풋볼을 즐기고 있다. 상당수는 관절염, 당뇨, 심장질환 등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여성 참여가 급증하는 게 두드러진다. 1970~80년대 ‘리오네스(Lionesses)’ 원년 멤버 중 한 명인 모라그 피어스는 이번 대회 여자 60세 대표로 출전한다. 랭워디 감독은 “헬스장이나 조깅 대신 팀으로 운동하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많다”며 “워킹 풋볼은 무엇보다 포용적인 스포츠”라고 말했다.
워킹 풋볼은 6대6 경기로 인조잔디 구장에서 진행된다. 뒤에서 태클과 신체 접촉은 금지된다. 노팅엄 포레스트 미드필더 출신인 74세 그레이엄 콜리어는 현재 잉글랜드 60세 대표로 뛰고 있다. 그는 “기술의 경기”라며 “공을 차는 감각, 패스의 정확도, 공간 읽기 등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노팅엄 트렌트대학 운동생리학자 이안 바리 교수는 2024년 FA 워킹 풋볼컵에 참가한 672명을 연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부상률은 매우 낮았으며, 대부분 ‘경미한 접촉’에 그쳤다. 참가자 절반 이상이 관절염·당뇨·암·뇌졸중 등 만성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경기 참여에는 큰 제약이 없었다. 바리 교수는 “두 엉덩이 관절을 모두 인공으로 교체한 사람도 있었다”며 “그런데 그는 여전히 경기장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정신적 효과도 두드러졌다. 워킹 풋볼 참가자 ‘고립감’ 지표는 영국 평균 5%의 5분의 1 수준인 1%에 불과했다. 주장인 존스는 “참가자들은 단순히 ‘몸이 좋아졌다’고만 말하지 않는다”며 “더 잘 자고, 자신감이 생기고, 친구가 생겼다고 말한다. 이건 거의 ‘마법의 운동’”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핵심은 사람이다. 동료, 웃음, 드레싱룸 농담 등이 우리를 다시 젊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워킹 풋볼은 단순한 노년층 운동을 넘어 의료적·인지적 치료 프로그램으로 확장되고 있다. 뉴캐슬대학 마리 풀 박사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재단과 함께 치매 친화형 워킹 풋볼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그는 “이들은 대부분 평생 축구팬”이라며 “다시 ‘팀의 일부’로 느낀다는 것, 그 자체가 치료적 의미를 갖는다”고 분석했다. 프로젝트에 함께한 루이즈 로빈슨 교수는 “몸과 두뇌를 동시에 훈련하는 스포츠”라고 강조했다. 파킨슨병 환자에게도 효과가 확인됐다. 잉글랜드 최초로 파킨슨 환자 워킹 풋볼을 창립한 폴 니콜스는 일상에서는 지팡이 없이는 걷기 힘들지만, 공을 잡는 순간 달리고, 회전하고, 드리블을 한다. 워킹풋볼협회 장애인 디렉터이자 파킨슨 환자 사이먼 포리스트는 “공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뇌의 명령이 신체 기능을 되살리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엘리트 레벨의 워킹 풋볼은 결코 ‘산책’이 아니다. 지난해 챔피언 잉글랜드는 올해도 강력한 우승 후보이며, 이탈리아가 가장 큰 경쟁자로 꼽힌다. 가디언은 “70세 대표팀 훈련 현장을 지켜보면 축구에 대한 열정은 은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 루이스 감독은 “우리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축구를 하고 있고 ‘월드컵’에 참가하기 위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으로 간다”며 “우리가 축구를 되찾았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