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껏 날을 세우고 세상을 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무례함과 서투름에 분노와 환멸이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어째서 저런 행동을 할까. 인간이. 일상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에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모든 순간 분개할 에너지도 없거니와 약간의 슬기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적어도 무례함과 서투름을 구별하려 노력합니다. 그 사람의 역사와 맥락에서는 그 서투름이,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역사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능은 절대선 아닌 특질일 뿐
쉰 명 중 한 명은 많이 서툴 수도
무례로 여겨 화내기보다 관용을

개인의 역사에 꽤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진 지능 이야기를 잠시 해보려 합니다. 임상심리학자였던 데이비드 웩슬러는 20세기 중반 지능검사를 개발했고 현재 한국에서 유일하게 법적으로 인정되는 지능 검사가 이 웩슬러 지능검사입니다. 그는 지능이란 무려 ‘목적성 있게 행동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환경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능력’이라 정의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능력치의 합인 지능을 갖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이 검사의 대원칙은 이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보정한 지능 검사의 평균을 100에 맞출 것. 즉, 모든 국가에서 지능의 평균은 100이 됩니다. 미국의 IQ 평균도 100, 한국의 IQ 평균도 100입니다. 또한 산술적으로 14명 중의 1명은 경계선 지능, 즉 지능 79 이하로 평가될 것입니다. 50명 중 1명은 지능 69 이하의 지적 장애에 속합니다.
아, 이 시점에서 함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능검사를 수도 없이 실시하고 가르칠 때마다 느끼는 점은, 지능은 우연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개인의 수많은 특질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귓불의 모양이나 발 크기 혹은 체중, 그 정도의 특질입니다. 한국과 같은 유교문화권에서는 높은 지능, 좋은 학벌이 유독 이상화되어 왔지만 지능은 절대선이나 뭔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지능‘만’ 높은 수많은 사례를 우리는 알고 있지요. 그저 귓불 크기가 적당하면 귀걸이를 할 때 조금쯤 편리한 것처럼 지능도 적당할 때에 편리한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또 우연한 유전자의 조합으로 누군가의 지능은 ‘적당’하지 않아 환경을 다루는 일에 서투를 수도 있습니다. 그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를 도우라고 문명과 시스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특질이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멸시하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단지 서툰 사람이 어떤 날 마시게 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너무 맛이 있었고, 어느 추운 날 그 음료를 따뜻하게 먹고 싶어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서툰 그 사람이 자신의 몸과 마음이 당장 너무 힘들어 다른 이들이 불쾌해할 법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는 무엇을 잘못한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뻔뻔한’ 얼굴로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언성을 높이거나 억지를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럴 수 있습니다. 열네 명 중 한 명, 좁게 잡아도 쉰 명 중 한 명은, 많이 서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온통 비난받기 쉽습니다. 우리는 지능과 교양을 이상화하고, 실제로 타인을 살피지 못하는 서툰 사람들에게 ‘공감은 지능’이라며 멸칭을 붙이고 차별합니다. 이 역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실은 지금 모두는 힘드니까, 하루하루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것이니까, 나의 기준에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날 선 반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리학을 업으로 삼고 십수 년을 지내고 보니 오히려 무례한 쪽은 제 쪽이었음을 눈치채기 시작했습니다. 각자의 역사와 맥락이 있어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들에게 교조적이며 폭력적인 잣대로 분개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서툴지는 않았지만 크게 무례한 쪽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쪽으로 급격히 태세를 전환했습니다. 아마 저조차 누군가에게는 서툴고 불쾌한 사람일 테니까, 언젠가의 나를 위해 사방에 관용의 융단을 미리 깔아두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타인의 서투름에 반사적으로 앙심을 품고 그 사람의 역사를 내 멋대로 납작하게 해석하고 오만하게 분개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왜 저럴까’라는 의미 없는 질문은 관두고 ‘그럴 수도 있지’로 입버릇을 바꾸었습니다. 너그러운 척도 점점 쉬워집니다. 딱 거기까지만 내 마음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다시 내 삶의 큰 흐름에 집중합니다.
마지막으로, 지적장애가 산술적으로 50명 중 한 명이라면 미국정신의학회에서는 왜 유병률을 100명 중 한 명으로 추산할까요? 실제로 지적장애인분들 중의 반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서툴지라도 자기 일상의 기능을 해내고 있어 진단 준거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와도 다르지 않게, 각자의 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중입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