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란디 유엔난민기구 최고대표

10년 임기의 마지막 해를 맞은 필리포 그란디(68) 유엔난민기구(UNHCR) 최고대표는 중앙일보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일부 정치인들이 외국인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지만, 진정한 지도자라면 사람들을 두려움이 아닌 연대로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란디 대표는 지난 17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사옥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한국은 기술력과 인도적 기여 모두에서 세계의 모범”이라며 “LG CNS와의 인공지능(AI) 난민심사 협력은 다른 나라에도 퍼질 수 있는 혁신적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누군가 유엔의 성취를 묻는다면 한국의 역사를 보라’고 한 말이 인상 깊었다”며 “실향의 아픔을 겪고 세계 강국으로 성장한 한국은 국제사회와 난민들에게 희망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6년 임명 이후 네 번째이자 마지막 방한인 이번 방문에서 외교부와 법무부,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 주요 부처 관계자들과 만나 인도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한국종교인평화회의와 이슬람교중앙회, 세계태권도연맹 등과도 만나 연대의 메시지를 전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번 방한의 목적은.
한국 국민과 정부가 지난 10년간 UNHCR과 전 세계 난민에게 보여준 강력한 지원에 감사를 전하기 위해 왔다. 또 새로운 정부와 향후 협력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임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코트디부아르 난민들이 25년 만에 귀환해 더는 난민이 아니라고 선언하던 날이 기억난다. 또 콜롬비아가 200만 명의 베네수엘라인에게 10년간 특별 지위를 부여해 사회 통합을 추진한 일도 큰 감동이었다.
한국의 난민 정책 평가와 역할 강화 방안은.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는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한국의 민간모금 중 개인기부자 규모도 세계 2위(1위는 스페인)다. 그런데도 난민 인정률은 3%에 불과하다. 매년 1만8000명 이상이 한국 정부에 난민신청을 하고 있지만 이중 3%만 난민으로 인정을 받는다. 심사 대기 기간을 줄이고 일시 체류자에게도 사회 참여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대목에서 한국은 AI 기술을 활용한 인도적 혁신을 선도할 수 있다. 한국의 기술은 인도주의 시스템을 한 단계 진전시킬 잠재력이 있다.
오늘 LG CNS와 미팅이 그 연장선인가.
그렇다. LG CNS의 AI 난민심사 프로젝트는 난민 등록, 정보 분석, 구호물자 배분 등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는 모범 사례다. 이러한 협력이 더 많은 한국 기업으로 퍼지길 기대한다.
한국은 난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다.
난민 자체가 아니라 혼란과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제도가 필요하다.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면 불안은 줄어들고, 인식도 바뀔 것이다.
전 세계적인 반이민 정서에 대한 견해는.
일부 정치인들은 외국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표를 얻으려 한다. 그러나 난민은 일자리를 빼앗지 않는다. 단지 이동성이 커졌을 뿐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사람들을 두려움이 아닌 연대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전 세계 인도적 지원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 난민들의 실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2025년 말 유엔난민기구의 가용 예산은 약 39억 달러(약 5조 5400억 원)로 예상되는데, 전년 대비 25% 감소했다. 그러나 강제 실향 규모는 10년 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의료, 교육, 주거 등 어느 것 하나 덜 중요한 분야가 없다. 모두 생명을 살리는 임무지만 지금은 그중에서도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기구로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의 재정 압박에 대한 우려도 있다.
세계 최대 공여국인 미국이니 충격이긴 했다. 업무를 3분의 1로 줄여야 했고, 직원 5000명을 해고해야 했다. 다만, 현재 이 행정부와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지원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또 유엔 80주년 개혁 이니셔티브(UN80)를 통해 조직 구조를 현대화하고 효율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몸집은 작아질 수 있지만, 지난 75년간 그랬듯이 우리는 여전히 현장을 지킬 것이다. 미국은 더 이상 압도적으로 가장 큰 공여국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다른 국가들이 더 많이 분담하기를 바라는 것은 합리적인 요청이라고 생각한다.
태권도박애재단(THF) 출범 등 스포츠 지원에도 적극적이다.
태권도는 난민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다. 난민 선수들이 올림픽 무대에 오르는 것은 세상에 ‘희망의 서사’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란디 대표는 끝으로 임기 마지막 한마디를 묻는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희망”이라고 답했다. 그는 미소를 띤 채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나의 철학”이라며 “그것이 인도주의의 본질이며, 한국은 그 희망의 증거”라고 말했다.
필리포 그란디는 누구

이탈리아 외교관인 필리포 그란디는 2016년 1월 1일 제11대 UNHCR 최고대표로 부임했다. 1957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난 그는 밀라노 주립 대학에서 근대 역사학 학사 학위 등을 취득했으며, 난민 및 인도주의 업무에 30년 이상 종사해왔다. UNHCR 최고대표로 선출되기 전에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UNRWA)의 사무총장(2010년~2014년)과 아프가니스탄 담당 유엔 사무총장 특별대표 등으로 활동했다. 그가 이끄는 유엔난민기구는 약 1만 9000명의 직원이 135개국에서 1억 2000만 명이 넘는 난민, 귀환민, 국내실향민 및 무국적자에게 보호와 지원을 제공하고 있으며, 두 차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란디는 올해 마지막 임기로 UNHCR를 떠난다. 최고대표 임기는 5년으로, 임기 중 연임이 가능하다. 통상 유엔 사무총장이 지명한 뒤, 유엔 총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으로 임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