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1995년 7월 18일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이 내란 혐의로 고발을 당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에게 내린 불기소 처분 이유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당시 검찰은 “신군부 세력의 새로운 정권 창출과 직접 연관된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사건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서 사법적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자 검찰을 비난하는 여론이 시민과 대학생들 사이에 폭발했다. 검찰을 규탄하고 정부를 성토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을 휩쓸었다. 이에 1995년 11월 김영삼(YS) 대통령이 던진 승부수가 바로 12·12 및 5·18 사건 특별법 제정이었다.

1979년 12·12 사건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이듬해인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로부터 3개월가량 지난 8월 16일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전두환 정권 탄생이 완성된다. 그런데 형법상 내란죄 공소시효는 15년이었다.
법조계 안팎에선 최 대통령 하야로부터 꼭 15년이 흐른 1995년 8월 15일 공소시효가 이미 끝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자연히 YS의 지시로 만들어지게 될 특별법은 공소시효 연장이 핵심 과제였다. 훗날 제정된 특별법은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 질서 파괴 행위에 대하여는 1993년 2월 24일까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다’라는 취지로 규정했다.
특별법을 통과시킨 국회는 “YS정부 출범일(1993년 2월 25일) 이전은 신군부 출신 전, 노 두 전직 대통령이 집권한 군사정권 시기였던 만큼 수사와 기소가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을 들어 공소시효 연장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특정인들의 형사처벌을 위해 국가가 임의로 공소시효를 늘리는 것은 헌법 13조 1항이 규정한 ‘형법 불소급의 원칙’에 어긋나 위헌”이란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법원의 위헌법률심판 제청으로 헌법재판소가 관여하고 나섰다.
특별법의 국회 통과 이듬해인 1996년 2월 16일 헌재는 재판관 4(합헌) 대 5(위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위헌 의견이 더 많았으나 ‘위헌 결정에는 재판관 6인 이상 찬성이 필요하다’는 헌법 규정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합헌이 되었다.

헌재 결론과 무관하게 검찰은 진작 행동에 나섰다.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95년 11월 30일 검찰은 12·12 및 5·18 사건에 대한 전면 재수사 방침을 천명했다. 당장 서울지검에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됨과 동시에 이종찬 당시 서울지검 3차장검사(훗날 청와대 민정수석 역임)가 본부장, 김상희 서울지검 형사3부장(훗날 법무부 차관 역임)이 주임검사로 각각 임명됐다.
이후 검찰의 전광석화와 같은 수사로 전, 노 두 전직 대통령이 영어의 몸이 된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군인의 총칼보다 더 무서운 것이 법이고, 그 법보다 우위에 있는 게 바로 민심(民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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