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과 일본이 정부 주도로 초미세 회로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민관 연구소에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첨단 반도체 기술 개발을 위해 수천억원에 이르는 고가의 장비에 투자하는 것으로, 예산 한계로 구세대 장비 도입이 추진되는 한국과 대조적이다. 첨단 반도체 기술 확보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국가반도체기술센터(NSTC)는 뉴욕주 소재 올버니 나노테크 단지에 EUV 노광장비 반입을 완료했다. 센터는 다음달부터 기업 대상으로 연구개발(R&D)에 EUV 서비스를 시작한다.
NSTC는 미국 정부가 50억달러(약 6조8000억원)를 투자, 지난해 2월 출범한 연구소다. 주요 반도체 제조사와 소부장 기업이 회원사로 참여, R&D를 함께 하고 있다.
NSTC가 도입한 EUV 노광장비는 10나노미터(㎚) 이하 초미세 반도체 회로 구현에 필수다. 네덜란드 ASML이 독점 생산해 대당 가격이 2000억원(NA 0.33 기준)을 훌쩍 넘긴다. 유지 보수 비용도 연간 200억~300억원에 달한다.
워낙 고가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해외에서는 TSMC·인텔·마이크론 등 일부 반도체 기업만 운용하고 있다.
진입 장벽이 높아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은 설비를 갖춘 기관을 찾아 EUV 장비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계 최대 반도체 연구소라 불리는 벨기에 아이멕(imec)이 대표적이다. 소부장 기업들은 아이멕에 연구인력이나 소재 등을 보내 테스트하고 있다.
미국 NSTC는 아이멕 역할을 자국 내에서 수행하기 위해 마련됐다. 미국의 모든 반도체 생태계 구성원이 참여해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는 목적이다.
실제 NSTC에는 엔비디아·인텔·애플·AMD·마이크론 뿐 아니라 글로벌웨이퍼스·솔에폭시·키사이트·크리스탈 소닉·캑터스 머티리얼즈 등 미국 소부장 기업, 연구기관 및 대학 등 100여곳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NSTC는 5000억원에 육박하는 차세대 장비 '하이 NA EUV 노광장비'도 내년부터 도입할 계획이다. 시스템 반도체 기준 2㎚ 이하 공정에 필요한, 훨씬 고성능의 장비다.
일본도 정부가 나서 EUV 장비 도입을 통한 기술경쟁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국립 연구기관인 산업기술종합연구소(AIST)에 EUV 노광장비를 갖춘 R&D 시설을 만들고 있다.
2027년 운영이 목표로, 반도체 소부장 강국으로 꼽히는 일본도 EUV 노광장비를 국가 연구기관에 도입하는 건 처음이다.
일본은 한발 더 나아가 인텔과 손 잡았다. 인텔은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 같은 시스템 반도체 뿐만 아니라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도 진출, 이들 분야에서 일본과 협력해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의도다. 일본은 인텔을 통해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 소부장 시장을 주도하려는 배경으로 해석된다.
반면 국내서 정부 주도로 추진되는 반도체 연구소는 미국, 일본과 큰 차이를 보인다.
2년 전 정부는 최첨단 장비를 갖춘 '한국형 아이멕' 구축 계획을 발표했지만 사실상 중단된 상태인 데다, 산업통상자원부와 SK하이닉스 및 일부 반도체 기업이 협력해 용인에 구축하는 '미니팹(트리니티 팹)'도 격차가 있다. 이 미니팹에는 EUV 노광장비가 아닌 '불화아르곤(ArF) 이머전' 장비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ArF는 현재 반도체 업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장비나 미세화에 한계가 있다. 미국과 일본, 선진 기업들이 앞다퉈 EUV 장비를 구매하려는 이유다. 그러나 미니팹 전체 장비 구입 예산은 3000억원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됐다. 우리나라는 예산 문제로 EUV 이전 세대 장비, 즉 구세대 장비에 투자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ArF 이머전 장비는 나노종합기술원은 물론, 일부 업체들도 자체 보유한 장비라 기술 경쟁력 강화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업계에서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결국 해외 연구기관의 EUV 노광장비를 활용해야하는데, 회비·시설 이용료·물리적 거리 탓에 중소·중견 규모의 소부장 기업은 사실상 활용이 불가능하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제조사에 품질 평가를 의뢰하려 해도 최소한의 품질 기준을 넘어야 하는데 EUV 장비 없이 R&D를 수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국내 기업의 EUV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정부의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진형 기자 j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