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관세 및 안보를 둘러싼 한·미 교섭이 이어지고 있다. 후자의 경우 한·미 원자력협정의 개정을 통해 한국 내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에 관한 미국의 동의를 얻고자 교섭 중이다. 대미 창구인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과 외교부 장관은 최소한 일본과 유사한 수준의 개정을 목표로, 핵무기 원료의 확보 같은 군사적 측면이 아니라 오직 산업적·경제적 측면에서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자국 내에서 20% 미만의 저농축과 재처리를 할 수 있으며, 또 해외 재처리도 미국의 동의 없이 통지만으로 사용후핵연료를 해외 반출하는 포괄적 사전동의 방식이 적용되고 있다. 1988년 개정한 미·일 원자력협정 이전에는 한·미 원자력협정과 마찬가지로 구속력이 강한 개별적 사전동의 방식이 적용되고 있었다. 이번 한·미 교섭에서도 미국 측은 재처리 동의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해외 재처리의 동의방식에 관한 소폭 개정만을 제안할 것으로 짐작된다.
원자력협정 개정, 농축 동의에 집중해야
필자는 재처리 건은 완전히 배제한 채, 오직 경제적 장점을 강조하면서 우라늄 농축 동의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쪽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다. 현재 한국은 23기의 국내원전(PWR)을 운영하고 있음에도 핵연료용의 농축우라늄을 전량 수입하고 있다. 따라서 적절한 규모의 저농축 시설 확보는 경제 규모 확대에 걸맞은 국가 에너지정책의 안정성 강화는 물론, 산업(전력)계의 위기관리에도 불가결한 핵심 사안이다. 2019년 일본 아베 정권의 반도체 세척제 등에 관한 수출 정지 조치로, 전량 수입에 의지하던 국내 산업구조의 취약성을 재인식하지 않았는가.
현행 한·미 원자력협정에도 저농축 우라늄의 안정적 공급을 보장받기 위해 미국의 협조를 요구하는 규정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의 노력 의무에 지나지 않는다. 2000년까지 국내에서 극소량의 핵분열성 물질을 몇 차례 분리·추출한 실험으로 국제적 물의를 일으킨 적 있다. 그러나 이후 한국의 의무준수 실태와 원자력 산업의 확대를 고려하면, 그동안 미국이 핵 비확산성을 고집해 한국의 상업용 저농축을 과도하게 구속해왔다고 할 수 있다. 덧붙이면 월성 원전의 중수로 3기는 농축우라늄을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가스 상태의 천연우라늄을 수입해 국내에서 핵연료로 성형·가공한다. 일본과 유사한 정도의 권한을 원한다면, 전기출력 100만㎾ 경수로 1기의 경우 1년에 약 120tSWU(분리작업단위·농축에 필요한 작업량 단위)가 필요한 점을 기준으로, 농축시설의 규모를 국내수요의 20~30% 공급력으로 한정해 교섭하는 것도 방법론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 발생 전에 경수로 55기를 운영했던 일본의 경우, 구형의 원심분리기를 이용한 농축공장의 최대능력이 1500tSWU로 약 13기분(약 25%)에 상당했다. 미국을 설득하는 실증적인 비교자료로 일본 사례를 인용해 명확한 수치를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단, 규모의 경제 및 해체비 등을 고려하면 수입품보다 비쌀 수도 있으며,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도 감수해야 한다. 현재 신형 원심분리기로 단계적으로 교체 중인 일본의 농축공장(현재 규모 450tSWU/년)은 2023년 불시 13회를 포함해 20회 넘는 사찰을 받았다.
불손한 의도의 ‘핵 마피아’들 재처리 고집
한편 농축과는 달리 재처리사업은 플루토늄(Pu)의 추출이라는 군사적 목적 이외는 백해무익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핵 마피아’는 경제성이 있다고 선전하면서 논리적 근거는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다. ‘핵 마피아’가 창조한 신화, 즉 재처리의 경제적 효과(?)란 크게 세 가지다. ①사용후핵연료 속의 자원을 94~96%까지 재활용해 우라늄 자원 절약 ②반감기가 길고 방사능이 높은 방사성 물질을 변환시켜 독성을 줄인다는 유해도 저감 ③ 앞선 두 가지 효과의 복합적인 결과로서 직접처분의 100분의 1로 된다는 최종처분장 면적 축소 등이다.
그런데 세 가지 경제적 효과(?)는 어디까지나 과학적 사실을 자의적으로 왜곡한 탁상공론이자 희망 사항을 펼쳐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①자원의 재활용률은 50~100년 후쯤 고속로 또는 대출력의 가속기가 상용화되더라도 최대 2.1% 정도에 그친다. 더구나 재활용에 필요한 준비공정에서 발생하는 손실과 투입에너지 등을 고려하면 오히려 마이너스 재활용률이 될 뿐이다. ②유해도(독성)의 감소 효과도 사용후핵연료 속에 있는 약 200핵종의 물질을 네 가지로 나누는 군(群) 분리율이 거의 100%에 가까워야 하고, 고속로 또는 대출력 가속기의 상용화로 100% 변환이 가능해야 한다. 게다가 남은 방사성폐기물의 60년 및 300년 냉각이라는 가정도 더해진다. 마치 신의 영역 같은 황당무계한 가정하의 공상소설 수준이다. ③최종처분장 면적의 축소 효과 역시, 비슷한 가정을 적용한 일본의 추산(4분의 1 축소)이 더 현실적이다. 그런데 직접 처분 전에 사용후핵연료를 중간처분장에서 300년간 냉각만 해도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해외연구도 있다. 재처리 때문에 핵연료 비용도 증가한다. 일본의 핵 마피아는 습식재처리(PUREX)로 경수로에 자원을 재활용할 경우 발전에 대한 플루토늄(Pu)의 기여분 증가로 우라늄 20% 절약에 상당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농축과정의 우라늄235의 농축도를 20% 올리는 것과 같은 효과인데, 그 농축 비용이 재처리 비용의 10분의 1 정도로 훨씬 싸다.
이런 명백한 과학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핵 마피아가 재처리를 고집하는 것은 오직 먹거리 확보와 기득권 확대만이 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올 9월 현재 국내 경수로에서 발생한 사용후핵연료는 약 1만1531t으로, 일본의 3만2000t 재처리사업비(9월 현재) 22조엔을 단순 인용하면 최소 약 75조6000억원의 거대한 먹거리가 확보된다. 게다가 국내 경수로 23기에서 매년 약 460t 재처리라는 지속적인 기득권도 보장된다. 수십조원의 고속로 개발비도 있다.
재처리사업은 군사적 목적 이외는 경제적 측면에서는 전혀 합리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과거 권위주의 정권처럼 일부 관료들의 판단만으로 수백조원의 혈세 낭비와 국가 존망을 위협하는 대참사의 발생 위험을 가진 재처리사업을 국민에게 강제하려는 꼴이다. 사용후핵연료의 처리·처분 문제는 미래 한국의 진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인 만큼 공론화를 통해 먼저 국민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 특히 국회에서의 재처리에 관한 공개 논의는 투명성·공개성의 강화책으로 미국의 핵 비확산주의자들의 반대를 완화하는 계기도 될 수 있다. 국가안보실을 비롯한 교섭 관계자들은 절대적(?) 힘에 대한 감성적 동경이 아니라 과학적·경제적 사실을 존중하는 겸허한 자세로서 실용주의적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장정욱 일본 마츠야마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