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42.195㎞
마라톤 풀코스를? 내가? 왜?
솔직히 처음에는 당기지 않았습니다. 러닝을 시작한 뒤에도 한참이나 스스로 믿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마라톤처럼 내 몸을 극한의 고통으로 밀어붙이는 모험이라면 극단적인 계기 같은 게 있어야 맞는 것 아닐까요? 가령 의사에게 “이대로 살다간 큰일 난다”는 엄포를 들었다거나, 헤어나기 힘든 상실 같은 걸 겪었거나 하는. 그러나 저에게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런 극적인 전환이 없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달리게 됐고, 달리다 보니 대회에 나가게 됐습니다. 5년 전만 해도 ‘마라톤 하면 무릎 나간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제가 마흔다섯 살이 된 올가을 세 번째 풀코스에 도전합니다. 11월 2일 열리는 JTBC 서울마라톤(제마) 출전을 준비 중입니다. 그 좌충우돌 도전기를 ‘어쩌다 42.195’란 이름으로 연재합니다. 오늘은 첫 순서로 달리기라면 질색이었던 아재의 러닝 입문 과정을 들려드립니다.
달리다 보니 체지방률 11%로 ‘뚝’
요즘 러닝이 대세입니다. 유통업계는 2025년 한국의 달리기 인구를 1000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 ‘안 뛰는’ 4000만 명 중 하나였습니다. 굳이 달릴 필요를 못 느꼈습니다. 성인이 된 뒤로 줄곧 체중 65㎏(키는 172㎝)을 유지했으니까요. 여행기자여서 걷기와 등산이 일상이었고, 스쿠버다이빙·서핑 같은 스포츠도 오랫동안 즐겼습니다. 굳이 달리지 않아도 건강하다고 자부했습니다. 참, 저는 1980년생입니다.
7년 전 조깅을 시도해 본 적이 있긴 합니다. 한데 고질병이 괴롭혔습니다. ‘콜린성 두드러기’라고 아시나요? 일종의 알레르기 질환인데요. 체온이 갑자기 오르면 온몸이 미칠 듯이 가렵습니다. 다른 운동을 할 때는 멀쩡하던 몸이 달리기만 하면 비명을 질렀습니다. 조금 달리다가 멈춰 서 배와 등을 벅벅 긁으면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달리기는 나랑 안 맞는다!

저는 2021년 서울 남산 자락으로 이사했습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갑갑한 시절이었죠. 마스크를 벗고 남산을 산책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남산은 낮습니다(해발 271m). 중턱 소월로에서 30~40분만 걸으면 정상 팔각정에 닿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했습니다. 걷기는 시시하니 뛰어서 올라볼까?
어느 여름밤, 뛰다가 걷다가 하면서 3㎞를 달려봤습니다. 땀범벅이 됐지만 해볼 만했습니다. 이후로 조금씩 거리를 늘렸습니다. 가을이 되자 약 7㎞의 언덕길을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됐습니다. 일교차가 크면 두드러기가 심해지는데 신기하게도 멀쩡했습니다. 체력이 향상된 것보다 이게 더 큰 기적이었습니다. 의료인이 아니어서 조심스럽지만, 콜린성 두드러기 환자 중에 꾸준한 운동을 통해 극복했다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달리기에 재미가 들리자 본격적으로 남산에서 뛰놀았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숫가를 늘 산책했듯이 말이죠. 일상이 불규칙한 직업이어서 매일 뛰기는 어려웠지만 짬이 날 때마다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루하루, 한주 한주 미세하게 달라지는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는 건 세상 어떤 오락보다 즐거웠습니다. 제게는 남산이 월든이었습니다.
러닝이 취미라고 하면 ‘얼마나 건강해졌는지’ 궁금해 합니다. 민망하지만 그간 달라진 건강지표를 공개해 볼까요? 동네 헬스장에 저의 2년치 인바디(체성분 분석기) 기록이 있었습니다. 중년 아재치고는 날씬한 편이라 체중은 2~3㎏ 감소하는 데 그쳤습니다. 대신 체지방률이 18.3%에서 11%로 뚝 떨어졌습니다. 스마트 워치는 제 신체 나이를 36세라고 합니다. 만성위염과 편두통도 개선됐습니다. 다만 얼굴이 핼쑥해져 “어디 아프냐”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영포티(자신이 젊다고 착각하는 40대) 논란도 있는 터라 “이래 봬도 몸은 30대”라고 으스대진 않습니다. 그냥 웃습니다.

요즘은 MZ세대만이 아니라 40~50대 주부, 60대 은퇴자도 열심히 뜁니다. 여느 운동보다 진입장벽이 낮다는 게 러닝의 최대 장점이죠. 사실 달리기는 중장년에게 더 좋습니다. 일이든, 뭐든 새로운 성취가 어렵다고 느껴지고 신체 기능이 퇴화하는 자신이 안타깝다면 기꺼이 달려보길 권합니다. 서서히 거리를 늘리다 보면 모처럼 성장하는 자신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44세에 달리기를 시작한 미국 심장병 전문의 조지 쉬언은 『달리기와 존재하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지난 40여 년 동안 나는 살 가치도 없고 불완전하며 열등한 존재라고 느끼면서 살아왔다. 내 본성에 맞서 싸우며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노력했다. 달리기는 남을 의식한 행동과 생각에서 나를 해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