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티오피아에 자리한 국제축산연구소(ILRI, International Livestock Research Institute)로부터 그들이 보존하고 있는 식물 종자의 안전보존 협력 요청이 있었다. 협의를 위해 11월 초 에티오피아로 향했다. 아디스아바바 공항에 도착해서 국제축산연구소로 가는 길, 차창으로 도심을 내다보며 내가 예상한 것과 너무도 다른 아디스아바바의 생생한 분위기에 압도됐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는 대부분이 판자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수년간 도시 구조·인프라·이미지 측면에서 급격한 변모를 겪었죠. 그 배경에는 여러 정치·경제·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특히 국제화, 브랜드화를 위한 국가전략이 강조되며 도시가 눈부시게 바뀌었어요. 새로운 도로와 호텔, 상업시설이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고 있습니다.”
현지인의 말처럼 차창 밖으로 펼쳐진 아디스아바바의 풍경은 내가 상상했던 먼지와 판자촌의 도시가 아니었다. 크레인이 솟은 건설 현장, 유리 외벽으로 빛나는 고층 빌딩들이 넓게 뻗은 포장도로 양옆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가축 방목지와 비좁은 시장, 판잣집이 뒤엉켜 있었다는 이곳은 이제 국제회의와 교류가 이루어지는 ‘동아프리카의 관문’으로 확실히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변화의 이면에는 여전히 개발도상국의 현실이 공존하고 있었다. 현지 연구소 관계자는 “낮에 회의하다 정전이 되는 일은 아직 흔하다.”라고 했다. 실제로 내가 방문한 날에도 전기가 잠시 끊겨 사무실의 회의가 중단되고 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잦은 정전과 불안정한 인터넷 속에서도 연구에 몰두하는 연구자들의 모습을 보며, 과학기술의 발전은 단순히 전력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시스템과 역량이 함께 작동해야 가능한 일임을 확신하게 했다.
내가 방문한 국제축산연구소는 1994년 설립된 비영리 국제연구기관이다. 본부는 케냐 나이로비에 있고, 아디스아바바의 연구소는 아프리카 동부 지역의 연구·협력 거점 역할을 한다. 국제축산연구소는 가축을 매개로 한 식량안보 강화, 빈곤 완화, 환경 지속성을 연구한다.
국제축산연구소의 연구는 단순히 가축 생산성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가축 건강과 질병 관리로 열대 질병의 확산을 막고, 가축 유전학과 영양, 사료 자원 연구를 통해 생산 효율을 높이며, 가축·기후·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분석하여 탄소 저감형 축산 모델을 제시한다. 또한, 사람·정책·제도 연구를 병행하여 개발도상국의 농가가 안정적으로 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정책적 기반을 마련한다.
이 중에서도 우리 측에 협력을 요청한 것은 그들이 보유한 주요 유전자원의 안전보존이었다. 국제축산연구소는 가축과 사료작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해 케냐와 에티오피아 양국에 유전자은행(Genebank)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아디스아바바 연구소에는 사료작물 종자(Forage seed)가 대규모로 보존되고 있었다. 그들은 열대와 건조지대의 목초, 콩과 사료식물을 수집하여 건조한 후 진공 포장해 영하 18℃의 저온 저장고에 장기 보존하고 있었다. 또한, 종자 보존이 어려운 열대작물은 조직배양 기술을 적용하여 보존하는데, 이러한 과학적 시스템은 단지 ‘보존’의 개념을 넘어, 멸종 위기 품종 복원과 유전자 다양성 확보라는 인류 공공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국제축산연구소 관계자들은 자부심과 함께 위기의식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은 최신 장비를 갖추고 있지만, 정전이나 장기 전력 불안은 여전히 위험 요인입니다.”
그 말에 나는 깊이 공감했다. 유전자원은 한 번 소실되면 복구할 수 없는 ‘생명의 기록’이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관리한다 해도, 전력 장애나 자연재해, 정치적 불안 등은 언제든 돌발 변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국제축산연구소가 보존 중인 사료 종자들을 우리 농촌진흥청 글로벌 시드볼트(RDA Global Seed Vault)에 안전중복보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했다. 이는 단순한 연구 협력 차원을 넘어, 전 지구적 유전자원 보전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실질적 대응이다.
현재 농촌진흥청은 수원에 있는 글로벌 시드볼트에서 국내외 유전자원의 2중·3중 중복보존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 중복보존이란, 원본(seed base collection)을 보유한 국가가 동일한 종자를 밀봉 포장하여 협약국의 시드볼트 저장고에 ‘블랙박스(Black-box)’ 형태로 위탁 보존하는 방식이다. 해당 자원의 소유권은 원본을 보유한 국가에 그대로 있으므로, 재해나 분쟁으로 원본이 소실되면 복원할 수 있는 ‘생명 보험’ 역할을 한다.
국제축산연구소를 나와 둘러본 아디스아바바의 도심 야경은 참으로 웅장하고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 지역에는 불안정한 전력과 제한된 연구 인프라, 그리고 기후변화라는 삼중의 도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유전자원을 관리하는 연구자들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국제축산연구소의 한 연구원이 내게 말했다.
“우리는 가축과 사료 유전자원으로 사람들의 미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가난과 기근에 맞서 싸워온 과학자들의 사명감이었다. 이번 방문을 통해 나는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유전자원의 보존은 기술뿐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국제축산연구소와 같은 국제 연구기관이 수집하고 보존하는 사료 종자는 지구의 다양성을 대표하는 귀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만으로는 완전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따라서 농촌진흥청이 운영하는 시드볼트와 같은 국가급 저장시설이 국제적 안전중복보존 허브로 기능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아디스아바바의 급속한 도시 발전은 인류의 가능성을 상징하지만, 회의 도중 찾아온 정전은 여전히 우리가 넘어야 할 현실의 벽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지금, 국제축산연구소에 보존 중인 가축 사료 종자를 농촌진흥청 시드볼트에 안전하게 중복보존하는 일은 단순한 국가 간 협력이 아니라, 전 인류의 식량안보와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국제연대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남성희 <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 농업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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