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물질 규소(Si)를 뜻하는 실리콘은 ‘산업의 쌀’ 반도체의 중요한 원재료입니다. ‘실리콘밸리’처럼 정보기술(IT) 산업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김상범의 실리콘리포트’는 손톱만 한 칩 위에서 인류의 미래를 이끄는 전자·IT 업계 소식을 발빠르게 전하는 칸업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해 주세요!
글로벌 판매량으로 테슬라를 앞지른 세계 1위 전기차 제조사 중국 BYD(비야디). 조만간 한국 진출을 앞두고 있는 BYD는 지난 12일 프리미엄 브랜드 ‘팡청바오’의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레오파드8’을 출시했다. 37만9800위안(약 7300만원)부터 시작하는 이 SUV는 외관상 두드러지는 점은 없지만, 기술적으로는 눈여겨볼 만한 특징이 많다.
우선 ‘BYD-화웨이’의 첫 작품이다. 통신장비로 유명한 화웨이는 자율주행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화웨이가 지난 4월 내놓은 스마트 드라이빙 시스템 ‘첸쿤(乾坤) ADS 3.0’이 BYD 모델 중 처음으로 레오파드8에 실렸다. 딥러닝 알고리즘으로 보행자·차량·표지판을 실시간 식별·추적하며, 지도에 없는 시골길에서도 자율주행이 가능하다. 백미는 원격 주차다. 운전자가 차에서 내려 목적지로 걸어가는 동안 차량이 알아서 주차를 해낸다.
더욱 흥미로운 지점은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가동하는 ‘반도체 칩’이다. 레오파드8에는 BYD가 맞춤 개발한 ‘BYD 9000 스마트 콕핏(조종석) 칩’이 들어갔다. 반도체 설계업체 미디어텍의 도움을 받았으며, 생산은 대만 TSMC의 4나노미터 공정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진출을 앞둔 중국 BYD는 중형 세단 ‘실’이나 소형 SUV ‘아토3’ 같은 비교적 저가형 모델을 먼저 선보일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경향신문 취재 결과, BYD는 레오파드8 공식 출시에 앞서 지난달 국내에도 디자인 등록을 마친 것으로 확인됐다. BYD가 장기적으로 첨단 소프트웨어 등을 앞세운 고급화 전략을 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BYD 자율주행 탑재한 ‘중국의 G바겐’, 국내 상표·디자인 등록 마쳐
자율주행과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에는 변화무쌍한 도로 상황을 해석·판단하는 강력한 두뇌(칩)가 필수다. BYD는 배터리부터 차체까지 전기차의 모든 부품을 수직계열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제는 ‘칩 내재화’에도 발을 들였다. 자율주행에서 비교적 후발 주자인 BYD는 최근 이 분야에 140억달러(약 19조원)를 투자하기로 한 바 있다.
그 배경에는 중국 전기차 시장의 사활을 건 경쟁이 있다. 중국 전기차 침투율(신차 중 전기차 비율)은 지난 8월 처음으로 50%를 넘어섰다. 더 이상 전기차 자체만으로는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가 어렵다. 특히 ‘링링허우’(2000년 이후 출생자)로 불리는 젊은 소비자들은 최신 소프트웨어 여부를 구매 결정의 잣대로 삼는 경향이 강하다.
이미 핸들·페달 조작이 부분 자동화된 ‘레벨2’ 자율주행은 기본 옵션이 됐으며, 최근에는 교통신호와 도로 흐름을 인식하는 ‘레벨 2.99’까지 등장했다. 삼성증권은 “중국에서 전기차는 BYD만큼 ‘가성비’를 갖추거나, 도심·고속도로에서 자율주행이 유용할 정도의 상품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분석했다.
BYD는 그동안 박리다매로 글로벌 점유율을 늘리는 데 집중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1대당 마진을 늘리기 위해 팡청바오를 비롯해 ‘덴자’ ‘양왕’ 등 프리미엄 브랜드를 잇달아 론칭하고 있다. 현지 매체들이 ‘중국의 (벤츠)G바겐’이라고 치켜세우는 양왕의 SUV ‘U8’은 출고가 110만위안(약 2억원)에 달하는 고급 모델로, BYD 자체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디파일럿’을 사용한다.
BYD는 레오파드8에 이어 U8의 상표권·디자인 등록 또한 지난달 한국에서 마친 것으로 확인됐다. 물론 상표 등록이 곧바로 출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신도 강한 데다, 양국 규제환경이 판이하게 달라 자율주행 기술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다만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한국 소비자들의 눈높이가 높고 시장은 크지 않지만 (미국 등 선진국 시장으로의) 게이트웨이(관문)로 쓸 수 있기 때문에 BYD 이외에도 지커 등 7~8개 회사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자율주행도 ‘엔비디아 천하’···현대차도 “의존성 줄여라” 분주
자동차 회사가 칩까지 만드는 이면에는 시장 지배자인 엔비디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도 숨어 있다. 인공지능(AI)뿐만 아니라 자율주행에서도 엔비디아는 장악력을 과시하고 있다. AI용 그래픽처리장치(GPU)에서 노하우를 쌓아온 엔비디아가 자율주행에서도 ‘명가’로 취급받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254TOPS(초당 1조번의 연산을 처리)의 성능을 제공하는 드라이빙 칩 ‘오린(Orin)’이 엔비디아의 베스트셀러다. 중국 자동차매체 ‘가스구’ 집계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오린은 131만5000개 팔리며 37.8% 점유율을 기록했다. 테슬라 FSD칩(34만3000개·26.7%)을 가뿐히 제치며 1위를 차지했다. FSD칩은 테슬라 차량에만 쓰이므로, 사실상 중국 자동차는 엔비디아가 꽉 잡고 있는 셈이다.
오린 가격은 사양에 따라 개당 3000~6000위안(60만~120만원) 정도다. 중국 전기차 업체 리오토는 엔비디아 칩을 구입하는 데 지난해 3억달러(약 4200억원)를 지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적지 않은 금액이다. BYD를 비롯한 전기차 업계가 “차라리 직접 만들자”고 나선 까닭이다. 앞서 지난 7월 ‘니오’는 업계 최초의 5나노 자율주행 칩 ‘NX9031’을 공개했다. 회사는 이 칩이 오린 4개 분량에 맞먹는 성능을 낸다고 홍보했다. 또 다른 업체 샤오펑도 인간 개입이 사실상 필요없는 레벨4 자율주행을 위해 맞춤 설계한 칩 ‘튜링’을 지난달 공개했다.
중국뿐만이 아니다. 도요타·닛산 등 일본 업계를 비롯해 한국의 현대자동차그룹까지 거의 모든 완성차 회사들이 ‘소프트웨어 기반 차량’으로의 전환 앞에서 ‘칩 의존성’을 고민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해 6월 반도체개발실을 신설하고 삼성전자에서 SoC(시스템온칩)를 연구해온 김종선 상무를 영입했다. 3~5나노미터 첨단 공정을 이용해 ADAS용 반도체 개발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칩 내재화가 가져올 수지타산 전망은 아직까지 안갯속이다. 중국 기업전문매체 ‘창업방’은 “차량용 반도체 중에서도 고급 스마트 드라이빙 칩의 연구·개발 비용은 상당히 높다. 개발에 드는 실제 비용은 아마도 수백억위안(수조원)에 달할 것”이라며 “게다가 자체 개발한 칩이 차량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