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된 우정의 끝은…소라 네오 감독이 그리는 ‘해피엔드’

2025-04-27

동아리방에서 밤새 함께 음악을 듣다 해가 뜰 때쯤 집에 가며 “이따 보자, 사랑해”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다. 영화 ‘해피엔드(Happyend)’의 첫 장면은 근미래 도쿄, 음악을 사랑하는 고등학생 5명의 우정을 소개하며 시작한다.

여느 때처럼 잘 가란 인사를 나눈 이들이 영영 서로를 못 보게 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해피엔드’는 러닝타임 내내 이 질문을 띄운다.

‘해피엔드’는 아버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의 마지막 피아노 연주를 담은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2023)를 연출한 소라 네오(空音央·34) 감독의 첫 장편극영화. 지난해 9월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프리미어 개봉했고, 국내에선 지난해 10월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상영돼 호평을 받았다.

영화의 주된 소재는 우정이다.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 만난 소라 네오 감독은 “나의 기반이라고 할 정도로 소중한 친구가 있었는데, 대학을 다니던 2010년대 발생한 사건·사고들로 친구와 생각이 다르단 걸 알게 돼 멀어졌다”며 기획 계기를 전했다.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정의 균열을 그렸다.

‘해피엔드’엔 다섯 친구가 등장한다. 디제잉에 관심이 많은 유타(쿠리하라 하야토·栗原颯人)와 4대째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한국인 코우(히다카 유키토·日高由起刀), 분위기 메이커이자 패션을 좋아하는 아타(하야시 유타·林裕太), 대만 혼혈의 밍(시나 펭), 친구들을 따뜻하게 보듬는 톰(아라지). ‘음악 연구 동아리’에 소속된 이들은 동아리방에서 테크노 음악을 디제잉하고, 서로의 집에 놀러가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행복을 느낀다. 유타와 코우가 사고를 일으키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둘은 교장 나가이(사노 시로·佐野史郎)의 고급 차량에 장난을 친다. 하필 그날 지진이 발생한다. 차량은 더욱 크게 파손되고, 교장은 감시카메라와 함께 AI를 통해 벌점을 매기는 대형 모니터를 설치한다. 처음에 장난으로 넘기던 학생들은 어느덧 AI 시스템의 논리대로 서로를 검열한다.

학교 밖의 상황도 악화된다. 총리는 지진을 이유로 “유사시 총리에게 권한을 집중시키겠다”고 발표한다.

혐오는 불안을 등에 업고 커져간다. 재일한국인의 거소증 검사는 강화되고, 한식을 파는 코우의 식당에는 ‘비(非)국민’이라는 낙서가 적힌다. 다섯 명의 친구들도 여파를 피해가지 못한다. 같은 교복을 입고, 취향이 비슷한 친구들이지만 삶의 궤적은 제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친했던 유타와 코우는 이 일로 크게 틀어진다.

감독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반원전 시위, 월가 점령 시위, 2014년 ‘흑인들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 2016년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인한 시위 등이 있었다”며 “이 일들을 겪으며 정치적 성향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감독은 이 혼란기를 비중 있게 여겼다.

특히 대학 시절 식민지 역사를 공부한 감독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돌았던 한국인을 향한 혐오가 현재에도 지진이 날 때마다 재일 쿠르드족을 향한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며 “당시 학살이 일어난 근본적 원인은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일본에 잔존하는 문제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영화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은 지진을 기점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낸다. 이들의 선택에 정답은 없다. 감독은 그 다면성을 섬세하게 빚어냈다.

영화 속 사회문제는 어느 하나 극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공고해 보였던 우정은 나름의 ‘해피엔드’로 나아갈 뿐이다. 그래도 영화는 내내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잃지 않는다.

장난기 있는 학생의 모습은 신예 배우들이 살려냈다. 다섯 명의 주인공 중 아타 역의 하야시 유타 배우를 제외하곤 모두 극영화에 처음으로 출연한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며 실제로도 친한 친구가 되어 기적 같다”고 전했다.

세련된 촬영과 음악 연출은 영화의 매력을 높인다. 카메라는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도 배우들의 동선을 활용하여 화면의 깊이감을 살리고, 서사에 맞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테크노와 클래식 장르를 조합한 음악은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를 잡아냈다. 화면과 음향 모두 감독의 고유한 취향이 돋보인다.

신인 감독의 신선한 매력에 홀린 듯 작품을 보고 나면 잊고 지내던 친구가 문득 떠오를지 모른다. 30일 개봉. 113분.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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