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테로이드 인류
백승만 지음
히포크라테스
과학책을 읽으면 충족되는 열망은 무엇일까? 대부분 호기심이나 탐구심이리라. 종종 학습욕에 불타서 과학책을 펼치는 경우도 있고, 다 읽고 나면 차오를 뿌듯한 성취감을 노리고 노력하기도 한다. 가끔은 동기와 무관하게 읽다 보면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넘기게 되기도 한다. 『스테로이드 인류』는 그런 재미를 주는 책이다. 과학책으로서는 드문 성취다.
사실 첫인상은 미심쩍었다. 제목부터 과장이 심할 것 같다는 걱정을 안겼다. “현대판 불로초”같은 어구들은 좀 무서웠다. 그런 말이 표상하는 주술적 사고방식이 얼마나 끔찍한 일들을 초래했고, 요즘도 각종 사기의 방편이 되는지. 어르신들이 강권해서 꾹 참고 넘겨본 자칭 의학건강비법서적—일본산이 많았다—들이 남긴 트라우마들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뒤표지에 인용된 머리말이 눈에 들어오면서 우려가 사라졌다. “… 연구자들도 껄끄러워하는 물질이 어떻게 약이 될 수 있었을까? 뭔가 사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사연들을 접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과정이 생각보다 어설펐음을 알게 된다면 스테로이드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나 환상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찾아보니 지은이는 현직 약대 교수. 이미 전작들이 화제였나보다.
총 4개 장으로 스테로이드들이 엮인 사연과 우여곡절이 전개되는 데, 대체로 발견된 순서를 따라간다. 1장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2장과 3장은 배란과 임신에 관계하는 ‘여성호르몬’들인 프로게스테론과 에스트로겐, 마지막 4장은 염증을 잡는다는 코르티손이 이야기의 방향을 잡는데, 치료제 개발과 실패 이야기가 당대의 사회 문화 경제 이야기와 매끄럽게 엮여 들어간다. 스테로이드들을 찾아내고 그 작용과 부작용이 드러난 과정을 읽다 보면 남성 호르몬이니 여성 호르몬이니 하는 명칭이 스테로이드들의 성질과 작용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또 약일 수만도 독일 수만도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된다.
사회 문화사 이야기이기도 한 덕분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기회도 제공한다. 1장의 첫 대목은 개 고환 추출액을 자기 몸에 주사한, 19세기 프랑스의 엽기적인 의사 겸 생물학자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의사에 대한 글쓴이의 평가는 간결하다. “독특한 발상으로 여러 번 구설수에 오”르다가, 제 “버릇을 못 고치고 또다시” 저지른 것이었다. 이쯤 되면 회춘하겠다고 해구신을 구해 먹는 일에 비해 어느 쪽이 더 주술적이고 더 폭력적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던 것이 불과 백여년 사이에 달라졌다. 이제는 도핑 검사를 할 때 몸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테스토스테론과 외부에서 주입한 테스토스테론을 방사성 탄소 동위원소 비율이 다른 점을 이용해서 구분할 정도란다.

결국 스테로이드란 무엇인가? 일단은 탄소고리 4개와 수산기(-OH)로 구성된 기본구조에 다른 원자들이 달라붙은 것들이다. 무엇이 어디에 얼마나 붙었는가에 따라서 종류가 많고, 때로는 서로 변환되기도 한다. 소위 남성 호르몬들이 여성 호르몬으로 변환되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세포막에 붙어서 세포의 활동을 바꾼다. 세포 활동을 직접 건드리니 심각한 병환에 기적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몸짱이 되겠다고 먹다가 심장 근육이 비대해져 급사하거나, 성기능장애나 당뇨, 정신질환이나 소위 ‘여성화’나 ‘남성화’ 등 만성질환과 장애에 시달리게 되는 일은 필연적인 셈이다.
지금 내 몸속에 각종 스테로이드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스테로이드 인류”는 약학자로서는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고 납득은 된다. 그래도 인류만 아니라 스테로이드들을 활용하는 모든 세포막 생물, 즉 동물은 물론 식물과 곰팡이의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은 후유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