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는 영혼이 있다, 복제해 나눈 사람들 하나로 연결”

2025-03-13

요제프 보이스의 멀티플 ‘유황상자’

봉준호 감독의 SF 신작 ‘미키 17’에는 ‘멀티플’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인간 복제가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시대, 나와 영혼을 공유하는 또 다른 육체의 존재가 바로 멀티플이다. 영화 속 세계에서 멀티플의 존재는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데, 한 사이코패스 과학자가 자신의 멀티플을 만들어 범죄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살인을 저지르는 동안 멀티플은 알리바이를 확보하는 식이다. 이 사건 이후, 하나의 영혼에는 하나의 육체만을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된다.

2차 대전 생환 후 예술 역할 고심

사람 머리 뜻하는 150개 빈 상자

“예술가는 세상 바꾸는 무당” 신념

죽은 토끼에 그림 설명 파격도

대입 제도 비판했다 교수직 해고

식목 행위예술 문화재로 남아

사진·판화 복제품이 멀티플

멀티플은 예술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개념이다. 판화나 조각, 사진처럼 하나의 틀이나 원본으로 동일한 작품을 여러 개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로 에디션이라고도 칭한다. 그런데 이 멀티플이라는 개념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한 예술가가 있다. 예술작품에도 일종의 영혼이 있으며, 따라서 이것을 여러 개로 만들어 많은 사람이 소유하면 그들이 정신적으로 연결된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예술적 영혼을 복수의 물건에 부여하고 널리 퍼트리면 사람들 사이에 공감과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을 통해 정신적 가치를 소통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이상주의자, 바로 요제프 보이스이다. 우리에게는 백남준의 절친한 동료로도 잘 알려진 보이스는 전후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꼽힌다.

1921년생인 요제프 보이스는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에 스무 살의 나이로 독일 공군에 자원입대했다. 1944년에는 그가 탄 폭격기가 크림 반도에서 러시아군에 격추되었다. 훗날 그는 당시 눈 속에 파묻혀 있던 자신을 그 지역 유목민들이 발견, 동물의 비계와 펠트 담요로 치료해 주었다는 일화를 만들어 예술적 페르소나의 근거로 삼는다. 실제 기록상으로는 독일군 수색대에 의해 구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쟁 중에 크고 작은 부상을 여러 번 입고 포로 수용소에 잡혀 있다가 종전을 맞았다.

전쟁이 끝난 후 보이스는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 입학해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의 후유증이 뒤늦게 몰려왔다. 그는 서른 초반에 2년 가까이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 상한 몸과 전쟁의 트라우마, 예술가로서의 역할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세상 만물이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한다는 강렬한 자각 속에서 어떤 영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영혼과 신비주의, 그리고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보이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예술가는 물질계와 정신계를 연결하는 중재자, 생명을 치유하고 세계에 변화를 이끌어내는 존재, 즉 무당이었다. 그는 무당으로서의 예술가라는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페르소나를 구축했다. 펠트로 된 모자, 조끼, 지팡이가 그의 기본 착장이었다. 독특한 외모와 강한 카리스마 때문에 어딜 가든 존재감이 엄청났다. 전쟁 중에 유목민에게 구조되어 치료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이런 캐릭터 구축을 위해 고안된 일종의 신화였다.

보이스는 일상적 재료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조각, 그리고 주술 행위를 연상시키는 독특하고 기이한 퍼포먼스로 특히 유명했다.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라는 1965년의 퍼포먼스가 그 대표적 예다. 제목 그대로, 그림이 걸려 있는 전시장 안에서 죽은 토끼를 팔에 안고 무언가를 속삭여 주는 행위로 이루어진 작품이었다. 자신의 머리와 얼굴에는 꿀과 금박을 칠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작품의 의미에 대해 보이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예술에 대해 어떤 이성적인 설명을 요구하지만 세상에는 직관과 영감으로만 이해되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예술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 그리고 죽은 토끼조차 이성적 사고로 경직된 인간보다 나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긴 작품이었다.

교육도, 정치도 예술

보이스는 교육자이자 정치활동가로서도 적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마흔 살에 모교인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나의 가장 위대한 예술”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부심과 사명감이 대단했다.

그의 수업은 주로 일상과 정치, 혹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토론으로 구성되었다. 기존의 교과 과정은 무시했다. 창작 행위는 철저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학생 각자의 특성에 맞춰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육은 모든 사람의 보편적 권리라고 선언하면서 대학의 선발 입학제도를 비판했다. 그는 입학시험에 떨어진 학생까지 자신의 수업에 받아들임으로써 대학 측과 강하게 부딪쳤다. 이 문제는 열띤 논쟁으로 이어져 마침내 학생들과 함께 대학 행정실을 점거, 결국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으로 종결되었다. 이때 그가 웃으면서 끌려가는 사진이 ‘민주주의는 즐겁다’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남아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그는 대학에서 해임되었다.

사회 개혁에 대한 강한 열망은 자연스럽게 정치 활동으로 이어졌다. 보이스는 일찍부터 환경보호에 관심이 많았다. 세상을 치유하는 무당을 자처한 데에도 인간의 욕심 때문에 파괴되는 자연에 대한 안타까움이 깔려 있었다. 그는 환경 오염이 우리 내면의 오염과 상응하여 진행된다고 생각했고 예술로써 인간의 내면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예술과 교육으로는 충분치 않았던 모양이다. 1980년, 미국 대형 미술관의 전시 제의를 뿌리치고 그는 독일 녹색당 창립에 힘을 쏟았다. 미국의 스타 작가 앤디 워홀에게 녹색당에 가입하라고 끈질기게 권유하기도 했다(워홀은 녹색당을 지지하는 포스터를 만들어 주고, 입당은 끝내 거절했다).

1982년에는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현대미술 행사인 카셀 도큐멘타에 참가하면서 떡갈나무 7000그루를 심는 프로젝트를 작품으로 내놓았다. 시작 전에는 수많은 반대와 회의론에 부딪혔지만 자신의 사비를 투입하여 실행을 관철시켰다. 첫 번째 나무는 시내 한복판, 가장 까다로운 장소에 손수 심었다. 이런 곳이야말로 사람들이 나무를 가장 필요로 하는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셀시 행정 당국과 시민의 참여로 이루어진 이 프로젝트는 완성에만 5년이 걸렸다. 정작 작가는 그 끝을 보지 못하고 1986년 세상을 떠났지만, 덕분에 카셀은 현재 도시 곳곳에 떡갈나무가 가득하다. 카셀시는 2012년에 도시를 변화시킨 공로를 기려 ‘요제프 보이스 길’을 만들었고, 예술 작품이 된 떡갈나무들은 현재 문화재 보호법하에 관리되고 있다.

세상에는 ‘미키 17’의 낙관주의도 필요

유일무이하고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는 예술가. 보이스는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예술을 위한 예술’을 거부했다. 그는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어떤 물건이나 행위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멀티플들은 그에게는 예술의 민주주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미키 17’ 얘기로 다시 돌아가면, 사회와 정치를 풍자한 이 블랙코미디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로는 흔치 않은 희망적 결말을 보여준다. 그런데 해피엔딩과 낙관주의는 종종 나이브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비관적인 회의론자가 대체로 더 매력적인 법이다. 복잡한 세상, 부조리한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의심과 절망의 능력이 더 단련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무턱대고 낙관적인 이상주의자도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요제프 보이스는 바로 그런 예술가였다. 생전에는 괴짜에 순진한 이상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더없이 진지했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작품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다. 저게 무슨 예술이냐는 말을 들었을 법한 형태의 작품들을 만들었지만, 작품과 작가가 구분되지 않는 그의 독창적인 삶은 그 자체로 전무후무한 예술이 되었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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