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의 끝자락 11월에 추적추적 비가 내릴 때면 하드록 밴드 건즈 앤 로지스의 ‘노벰버 레인(November Rain)’이 떠오른다. 약 9분에 달하는 러닝 타임으로도 유명한 곡이다. 뮤직비디오는 결혼식으로 시작해 장례식으로 끝난다.
11월의 차가운 비와 함께 떠나간 골퍼가 있다. 선수 경력뿐 아니라 코스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친 제임스 브레이드다. 그는 해리 바든, JH 테일러와 함께 ‘위대한 삼총사’로 불렸는데, 이들 셋은 1894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21년 동안 디 오픈에서 16회나 우승을 나눠 가졌다.
바든과 테일러는 잉글랜드 출신이었지만 브레이드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가 있는 파이프주가 고향이다. 브레이드의 부모는 골프를 치지 않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지역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면서 골프를 배웠다. 8세 때 주니어 캐디 대회에서 우승했고 16세 때는 핸디캡 0의 스크래치 골퍼가 됐다.
하지만 브레이드는 골프에 매진할 수 없었다. 13세 때부터 목수 일을 했던 그는 1893년 친구의 권유로 런던으로 이주해 육군과 해군 용품점에서 골프채 제작자로 일을 시작했다. 주말에는 골프를 칠 기회도 생겼다.
브레이드가 디 오픈에 처음 출전한 건 1894년으로 당시 10위를 기록했다. 이때 우승자가 테일러였다. 바든은 브레이드와 동갑, 테일러는 브레이드보다 1살 어렸지만 바든과 테일러는 이미 1894년부터 1900년까지 7년 동안 디 오픈에서 3회씩 도합 6차례나 우승하는 등 일찌감치 스타로 떠올랐다.
브레이드가 디 오픈 첫 정상에 오른 건 31세 때인 1901년이다. 뮤어필드에서 열린 대회에서 바든을 3타 차로 따돌리고 자신의 첫 번째 클라레 저그를 들어 올렸다. 첫 우승을 하는 데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첫 티샷이 심한 훅이 나면서 OB 구역으로 가고 만 것이다. 마지막 72번째 홀에서 어프로치 샷을 할 때는 샤프트가 부러지면서 헤드가 클럽하우스 쪽으로 날아가는 일도 겪었다. 다행히 볼은 의도했던 방향으로 날아간 덕에 우승을 차지하는 데에 지장은 없었다.
우승 물꼬를 트자 브레이드는 승승장구했다. 1901년부터 1910년까지 디 오픈 기록을 보면 ‘우승-준우승-5위-준우승-우승-우승-5위-우승-준우승-우승’이다. 10년 동안 우승 5회, 준우승 3회, 5위 2회를 기록한 것이다. 브리튼 섬 최강자였던 셈이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브레이드는 롱 게임 실력이 특출났다. 부드럽게 휘두르면서도 장타를 펑펑 날렸다. 하지만 그린 플레이가 문제였다. 그런데 1900년 나무 헤드 퍼터를 알루미늄 퍼터로 바꾸고 연습에 매진한 끝에 퍼팅 달인으로 거듭났다. 테일러가 “나는 브레이드처럼 10야드 이내 퍼트를 일관되게 잘하는 선수를 보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브레이드는 코스 설계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브리튼 섬에서 약 200곳의 코스를 디자인하거나 리모델링에 참여했다. 커누스티의 경우 한때 무적으로 불렸던 앨런 로버트슨의 최초 10홀 설계와 올드 톰 모리스의 18홀 증설, 그리고 1920년대 브레이드의 변형을 거쳐 가장 난해한 디 오픈 테스트 무대로 거듭났다. 로열 트룬 역시 브레이드의 손길을 거친 곳이다. 브레이드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글렌 이글스에서는 1921년 영국과 미국팀의 친선 경기가 열렸는데 이게 유럽과 미국의 골프대항전인 라이더컵의 시초다.
브레이드는 ‘생각하는 골퍼’를 위한 디자이너로 평가받는다. 그는 바람의 방향, 잔디 상태, 그린 크기, 티잉 구역 위치 등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모든 골퍼에게 즐거움과 도전의 기회를 동시에 주고자 했다. 브레이드 코스의 레이아웃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되는 비결이다.
브레이드는 인품으로도 존경을 받았다. 항상 모자를 쓰고 재킷 차림에 타이를 맸던 브레이드는 말수가 적고 타고난 겸손함을 지니고 있었다. 골프 작가 버나드 다윈은 “브레이드는 품위 있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으며 성공에 도취되지 않았다. 코스 안팎에서 훌륭한 매너를 보여줬다”며 “그의 행동은 프로 골퍼의 위상과 명성을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잉글랜드의 위대한 선수였던 헨리 코튼은 “브레이드를 아는 모든 사람은 그에게서 겸손, 품위, 침묵, 지혜, 그리고 친절함을 보게 된다”고 했다. 브레이드는 1904년부터 195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런던 인근 월턴히스 골프코스에서 헤드 프로로 근무했다. 그는 월턴히스의 클럽하우스에 드나들 때 항상 뒷문으로 다녔는데 그곳의 명예 회원이 된 후에도 이는 변치 않았다.
브레이드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에게는 맞설 상대가 많았다. 그러나 적은 없었다’. 브레이드가 80세로 세상을 떠난 1950년 11월 27일, 런던에는 비가 내렸다.



![우리가 상상 못했던 ‘황유민의 압도적 인기’…‘절친 이율린’ KLPGA 인기상 돌풍 이유도 ‘황유민 영향’? [오태식의 골프이야기]](https://newsimg.sedaily.com/2025/11/26/2H0LPYKHEY_7.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