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 동안 이맘때마다 노동시간 연장에 반대하는 글을 세 번이나 썼다.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정부와 산업계가 매년 제목과 강조점을 조금씩 바꿔가며 노동시간 연장을 이야기해온 탓이다.
이번에 들고나온 레퍼토리는 반도체 산업, ‘고소득 전문직’에 해당하는 연구·개발직군의 근로시간 특례 적용이다. 지난 20일 열린 국정협의회에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현재와 같은 근로시간 체계로는 집중 근무가 어려워 연구 단절이 발생하고 제품 수요에 즉시 대응이 어렵다며, ‘꼭 필요한 시기에 꼭 필요한 일을 집중해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근로시간 특례가 빠진 반도체특별법은 그저 ‘반도체보통법’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분위기가 이러니 다른 산업들도 덩달아 나서고 있다. 아니 연구·개발은 반도체 산업만 하나? 조선업, 건설업, 방위산업에서도 앞다퉈 주 52시간 특례 적용을 요구하고 있다.
장기간 누적된 과로, 야간 노동이 초래할 수 있는 다양한 건강 피해, 특히 급성심근경색이나 뇌졸중 같은 문제는 이미 너무 잘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장시간 노동조차 (잘 쉬면 괜찮은 게 아니라) 건강에 부정적이라는 것도 많은 연구에서 입증되었다.
사회적 안녕, 일과 삶의 균형은 어떤가. 부모가 밤늦게 퇴근하면 어린 자녀들이 ‘아,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서 국가경쟁력을 위해 연구·개발에 매진하고 계시는구나, 이번주에는 특별히 내가 스스로 밥도 차려 먹고 목욕도 하고 유치원 준비물도 잘 챙겨야겠구나’ 이런 결심이라도 하게 될까? 국가소멸 위기라고 호들갑을 떨며 연일 저출생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노동시간 연장을 둘러싼 집념과 집착을 보면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정작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건강이나 삶의 질은 차치하더라도, 이렇게 장시간 노동을 하면 정말 생산성이 좋아지냐는 것이다.
2023년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우리 사회에 ‘디지털 디톡스’ 열풍이 일었던 적이 있다.
이 책은 휴대전화와 알고리즘의 포로가 된 개인의 습관을 바꾸자는 자기계발서처럼 여겨졌지만, 책에서 제안한 집중력 되찾기 운동은 훨씬 ‘사회적’이었다. 저자는 주 4일제 근무 실험에 참여했던 노동자의 “정신이 덜 산만해졌다”는 이야기를 인용하며,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것이 개인의 결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에 “유일한 장기적 해결책은 노동조합을 꾸준히 결성해 노동자들이 이러한 기본권을 요구할 힘을 되찾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우리의 뇌는 화수분도, 무한동력도 아니다.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정신노동이 지속되면 우리의 뇌에서 기억력, 집중력, 판단력 같은 자원이 고갈된다. 그래서 새로운 정보가 입력되지 않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 피로’ 혹은 ‘인지 고갈’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뇌는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과 전기적 신호를 통해 작동하는 복잡한 신경연결망 장치다. 과도한 부담과 스트레스는 이런 신경전달물질을 고갈시키거나 분해 부산물을 축적하고 신경 연결 부위의 반응을 더디게 만든다.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은 기억능력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해마, 판단력의 ‘컨트롤 타워’인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사람이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고 창의력은 휴식과 여유에서 나온다. 굳이 뇌과학을 끌어들일 것도 없이, 연구·개발 종사자라면 누구나 ‘해봐서 아는’ 상식이다. 연구·개발직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연장하면 그만큼 성과물이 늘어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정신노동을 실제로 해본 적이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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