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이사르를 좋아했던 단테는 카이사르를 살해한 브루투스를 지옥에 보냈다. 『신곡』에 나오는 9개의 지옥 중에 가장 깊은 지옥, 배신의 죄를 범한 사람들이 가는 지옥으로. 나태주 시인은 ‘내상’이란 시에서 이렇게 썼다. “카이사르를 죽게 한 것은 적군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 가장 아꼈던 사람, 자식처럼 믿었던 사람, 브루투스에 의해서였다. 브루투스가 칼을 들었을 때 카이사르는 그 칼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들 같은 사람의 칼을 맞고 카이사르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실제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의 칼이어서 고요히 수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인의 관점은 마음을 움직인다. 그 후 이렇게 묻는 시인의 물음까지. “나는 대체 누구의 브루투스였으며 나에겐 또 누가 브루투스였을까?”
질투가 자신을 찌르는 독 될 수도
생각하는 대로 세상은 만들어져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시작되기에
집착 버려야 자신의 가치 알수 있어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지, 왠지 불편한 사람, ‘나’를 자극해서 삶을 흔들어놓고는 오히려 너 때문이라고, 네게 상처받았다며 공격해대는 사람! 그런 사람이 가까운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 그를 화두 삼아 ‘나’를 알아가는 수밖에.
요즘 조용히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은중과 상연’이다. 말할 것도 없다. 상연은 은중의 브루투스다. 그런데 상연은? 상연 스스로도 자신이 은중의 브루투스였다고 생각했을까.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칼을 맞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은중과 상연’, 30년 동안 이어진 여자들의 우정 이야기다. 그 우정은 우정의 이데아 관포지교(管鮑之交)를 생각하면 우정에 대한 모욕이지만, 그 모욕 속에서 피어나는 ‘자기 이해’라는 꽃은 모욕을 감당하기에 충분하다. 사랑하며 집착하며 질투하며 미워하며, 만나고 있지 않은 시간에서조차 서로를 떠나지 못하는 관계엔 지옥을 만드는 칼이 있다. 드라마에서 그 칼을 쥔 이는 일차적으로는 상연이다.
상연은 엄마·아빠가 든든했고, 멋진 오빠가 있었다. 똑똑한데 예쁘기까지 하다. 꼬인 데 없이 반듯한 은중은 그런 상연을 동경했다. 더구나 은중에게는 아빠가 없다. 아빠 없는 빈자리, 아프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빠 없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면 왜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부끄러움이 되어야 하는지. 그 묘한 괴리를 ‘나’를 만나는 시간으로 삼게 해준 따뜻한 선생님이 있다. 바로 상연의 엄마다. “슬픈 날에는 일기를 써. 선생님에게 보여주는 일기 말고, 진짜 일기!”
은중의 내면이 세상의 편견으로 흔들리지 않고 단단해지는 데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중에게는 그 진심들을 수용하는 힘이 있다. 상연은 그런 은중이 좋으면서도 불편했다. 상연이 쓴다. “모두가 은중이를 좋아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좋아하기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미웠다.”
이 익숙한 미움, 이것이 힘을 가지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삶이 드라마가 된다. 동생인 자기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세상을 뜬 오빠가 은중에게는 아끼던 카메라를 주고 떠났다! 너무나도 멋진 오빠가 하룻밤 사이에 세상을 등지자 오빠를 사랑했던 엄마도, 집안도 무너졌다! 살기 위해 상연은 오빠의 행적을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관심을 갖게 된 남자는 이미 은중의 연인이다! 의미가 만들어지는 순간순간에 은중이 걸림돌로 놓여있는 것이다. 은중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인데.
오빠의 죽음이, 그로 인해 망가진 엄마가 삶을 전쟁터로 만들며 상연을 무너뜨리는 시간에 은중은 차근차근 자신을 성취해간다. 상연은 그 친구를 향해 괜히 소리를 지르고 싶다. 너 때문이라고, 상연의 시선은 늘 은중에게 있다. 은중을 질투하느라 스스로의 가치를 외면한 채 은중의 근처에서 맴돌다 스스로 고립된다. 니체가 말했다. 질투는 마침내 전갈처럼 독이 있는 꼬리로 자신을 되찌른다고. 가진 것을 누리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것, 가질 수 없는 것에 시선이 꽂혀있을 때 우리는 콤플렉스가 작동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콤플렉스를 인지하고 돌보는 시간을 갖지 못하면 삶은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늘 폭탄을 안고 있는 것처럼 살아왔던 상연이 마침내 자신을 보살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치고 있을 때였다. 그때 그녀는 비로소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말을 꺼내 보인다. 엄마가 은중이 너를 더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오빠가 자기 때문에 죽은 줄 알았다고.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이들의 대화에 답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가 아니라 아이가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은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은 그렇게 된다. 생각이, 마음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숙제는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을 잡는 것이다. 마음이 잡히면 죽어가면서도 편안하지만, 마음에 휘둘리면 삶이 폭탄이다. 붓다의 가르침 사성제(四聖諦)가 알려주는 것이 있다. 고통은 바로 집착에서 온다는 것! 고통의 근원에는 미워하고 애착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 집착을 돌이켜 내려놓기 전에는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지도 알지 못한다. 상연을 보니 알겠다. 한 생각 돌이켜 스스로를 이해하는데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는 걸, 그러나 그래도 괜찮다. 돌이켜 마음을 잡을 수만 있다면!
이주향 수원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