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 여성 초상화를 통해 본 중세 유럽의 문화

2025-03-10

화관을 쓴 순백의 신부가 말갛게 상기된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초상화 속 여인은 19세기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 오늘날의 시선으로 여왕의 옷차림은 아름답고 기품이 넘쳐 왕실의 법도에 한 치 어긋남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은 여왕의 웨딩드레스가 낯설고 소박해 마치 ‘시골 소녀’ 같다며 수군거렸다. 사실 중세시대 왕실의 결혼식은 가문의 지위와 부를 드러내는 무대로 여겨졌고, 전통대로라면 여왕도 담비 털과 금실로 장식된 호화롭고 붉은 벨벳 가운을 입을 것으로 기대됐기 때문이다. 스무 살의 어린 여왕은 막 프랑스에서 건너온 최신 유행의 드레스가 입고 싶었다. 그래서 흰색 새틴과 레이스 소재를 골라 가녀린 어깨와 잘록한 허리가 돋보이도록 치마가 동그랗게 퍼지는 드레스를 직접 디자인해 입으며 왕관 대신 긴 베일이 달린 화관을 썼다. 여왕이 하는 모든 것이 곧 유행이 되던 시절 순백의 드레스와 베일은 금세 대중에 퍼져 신부들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됐다.

그림을 감상할 때 인물이 입은 옷이나 장신구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세의 서양 회화에서 보이는 소품들은 그 무엇도 허투루 그려지는 법이 없다. 특히 초상화의 주인공이 직접 골라 입은 옷과 장식에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담기게 된다. 개개인의 취향부터 당대의 시대상과 문화·경제·역사적 흔적까지 고스란히 읽을 수 있는 정보의 보고인 셈이다. 책은 이처럼 초상화 속 인물이 입고 있는 의복과 장신구 등을 통해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흥미로운 시도를 한다.

저자는 특히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까지 그려진 초상화 속 여성들에게 주목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의 주인공인 스페인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 여전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프랑스 로코코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프랑수아 부셰가 아름답게 담아낸 ‘퐁파두르 부인’ 등을 소환해 이들이 걸친 복식의 유래와 문화적 의미, 인물과 그림에 얽힌 비화 등을 샅샅이 살펴본다. 저자는 “사회는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돌아갔지만 여인들은 의복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치장에 눈을 뜨고 경쟁적으로 스타일을 만들어 전파하던 여인들의 열정적인 삶과 이야기를 담았다”고 썼다.

서양 복식사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흥미로우며 그림을 감상하는 새로운 시각까지 선사한다. 일례로 마르가리타 공주가 입었던 과르디판데(지지대를 넣어 크게 부풀린 치마)의 경우 여성의 부정 행위를 위해 탄생한 ‘몹쓸 옷’이라는 이유로 금지됐지만 궁정에서조차 대유행하며 그림으로 남았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가볍고 얇은 모슬린으로 만든 드레스를 좋아해 이 옷을 입고 초상화를 그렸는데 마치 속옷(슈미즈)을 입은 시골 아낙네 같다며 군중들에게 미움을 샀고 훗날 프랑스 혁명의 불씨를 키웠다. 2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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