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시의 도코나미(床波) 해안에선 바다 한가운데 솟은 특이한 형태의 굴뚝 모양 구조물 2개를 볼 수 있다. 해저 탄광인 조세이(長生) 탄광의 구조물로 광부들에게 유일한 숨구멍 역할을 하던 환기구다. '피어'로 불리던 이 환기구는 한마디로 광부들의 생명선이었다.
조세이 탄광은 1932년부터 본격적으로 석탄 채굴을 시작했다. 해저 탄광은 급료가 높아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지만, 조세이 탄광은 "위험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일본인들이 기피했다. 그래서 탄광 측은 일본인 대신 조선인 광부를 많이 고용했다.
실제로 해저 갱도가 지나는 지층 두께가 30m로 당시 관련법 기준인 40m보다도 낮았다. 엄밀하게 따지면 불법 채탄장이었던 셈이다. 조선인 광부가 많고 탄광 이름도 조선의 일본식 발음인 '조센'과 발음이 비슷해 '조선 탄광'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1941년 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석탄 수요가 급증했다. 관공서는 증산을 채근했고, 결국 무리하게 채굴을 하다 이듬해 2월 3일 해안의 갱도 입구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서 약해진 터널 틈을 바닷물이 침투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갱도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수몰된 광부는 총 183명, 이 중 136명(약 74%)이 조선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역사는 한 일본 시민단체가 발굴하기 전까지 일본사회에서 잊혀졌다. 해당 단체인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은 지난 30년간 조세이 탄광의 역사와 수몰 참사의 진실을 추적해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는 신념에서였다.
이 단체의 노력으로 수몰 참사 희생자 183명이 누구인지 모두 파악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희생자들의 이름이 담긴 추모비도 세울 수 있었다. 단체는 '피어'란 해상 환기구 보존에도 힘썼다. 갱도 입구가 철거되면서 탄광 위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피어가 갱도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유일한 식별 장치였기 때문이다.
단체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갱도 입구 위치도 파악했다. 일대 토지 소유주인 우베시 측이 "발굴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버텼지만, 단체 측은 "우베시 입장이 발굴 자체를 중단하라고 한 건 아니다"며 발굴 작업을 강행했다. 그 결과 지난 9월 25일 갱도 입구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달 6일 발굴 현장에서 이 단체의 이노우에 요코(井上洋子) 대표를 만났다. 그에게서 갱도 입구 발굴과 관련한 뒷얘기도 들었다.
이노우에 대표에 따르면 당초 갱도 입구로 추정했던 위치를 파헤쳐 봤지만 도무지 갱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발굴 작업을 하던 굴착기에 쓰레기 포대가 걸려 올라온 모습을 보고 "맹지에 갱도 입구 같은 구멍이 있다면, 사람들이 구멍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고 한다.
이후 묻혀 있던 쓰레기 더미들을 다 파내자 높이 1.6m, 폭 2.2m의 목재 틀이 모습을 드러냈다. 갱도 입구의 틀이었다. 10살 때 조세이 탄광에서 일했던 정석호(92)씨가 보자마자 "갱도다"라고 외칠 정도로 현장은 잘 보존돼 있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해저 갱도에 쓰였던 소나무 목재는 부식 등에 강해 수십 년을 물속에 잠겨 있어도 좀처럼 썩지 않는다.
이노우에 대표는 "이젠 일본 정부가 협조할 것"이라고 한껏 부푼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동안 유골 발굴을 요청할 때마다 일본 정부는 "갱도의 입구나 유골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이유를 대며 협조하지 않았는데, 갱도 입구를 발견한 이상 요청을 들어주지 않겠느냐는 희망이었다.
지난 10월 30일에는 해저 갱도에 대한 입수 조사도 진행했다. 당시 전문 잠수사가 갱도 입구에서 2개 환기구의 중간 부분인 200m 지점까지 전진했다. 잠수사는 "갱도 안쪽까지 200m는 더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면서 "보존 상태가 양호해 유골 발굴 작업도 가능할 것"이란 의견을 단체에 밝혔다고 한다.
하지만 단체의 기대와 달리 일본 정부는 조세이 탄광 발굴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후쿠오카 다카마로(福岡資麿) 일본 후생노동상은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안전성을 확인할 수 없어 지금은 발굴 작업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는 일본 정치권에선 소수 야당인 사회민주당 정도가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노우에 대표는 후쿠시마 미즈호(福島みずほ) 사민당 당수와 사민당 소속 오오쓰바키 유코(大椿裕子) 참의원과 함께 지난달 31일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정부에 수몰 참사 진상 규명과 유골 발굴을 촉구했다.
지금까지 이 단체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일본과 한국 시민들이 후원한 1200만 엔(약 1억1000만원)으로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해저 탄광 탐사와 유골 발굴에 자원 의사를 밝힌 한국인 잠수사도 있다. 해군특수전전단(UDT) 출신 수중 탐사 전문가인 이원영씨는 "진상 규명과 희생자 유해 발굴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단체 측은 본격적인 유골 발굴 작업을 내년 1월 31일부터 나흘간 재개할 예정이다. 이노우에 대표는 "다음 작업 때는 유골 한 조각이라도 반드시 가지고 나오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유골 회수에 성공하면 일본 정부에 진상 규명과 발굴 작업을 촉구하는데 큰 동력이 될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내년이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인 만큼 한국 정부의 관심이 중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후쿠시마 당수는 "일본 정부에 요청하기만 해선 10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양국 시민의 관심과 한국 정부의 참여를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