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배달 시대 성큼

“먼저 멈추는 게 꼭 사람 같네.”
지난 4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횡단보도. 보행로 사이를 요리조리 달리던 자율주행 배달 로봇이 행인들을 피해 멈춰 서자 감탄사가 쏟아졌다. 행인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엔 ‘요기요는 역삼동에서 로봇 배달 중’이라고 적힌 배달앱 요기요의 자율주행 배달 로봇 ‘뉴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성인 무릎 높이의 박스형 본체에 네 바퀴가 달린 뉴비는 10분가량을 더 달려 보행로 끝에 멈춘 뒤 주문자를 기다렸다.
이튿날 서울 강남구 언주로 차병원 사거리에선 배달앱 ‘배달의민족’의 자율주행 배달 로봇 ‘딜리’가 배달에 한창이었다. 사람이 걷는 속도와 비슷한 시속 5.4㎞로 달리던 딜리가 차량 진입 차단봉과 보행자들을 피해 횡단보도 앞에 멈춰 녹색 보행 신호를 기다리자 행인들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며 “신기하네” “귀엽다”는 반응을 보였다.
횡단보도를 건넌 딜리가 5분쯤 뒤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건물 앞에 멈추자 배달 신청자가 다가와 뚜껑을 열고 주문한 물건을 꺼냈다. 배달의민족은 도착 100m 전에 주문자에게 사전 알림 메시지를 보내 도착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배달 물품을 전달받은 허순애(56)씨는 “차도, 사람도 많은 동네라 매우 붐비고 복잡한 길인데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하는 걸 보니 나보다 똑똑한 것 같다”며 만족해했다.
국내 배달앱 운영사들이 무인 자율주행 배달 서비스를 앞다퉈 확장하고 나서면서 서울 강남 일대가 배달 로봇의 격전장으로 떠올랐다. 포문을 연 것은 배달앱 요기요. 지난달 17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과 주변 지역에서 자율주행 로봇 배달 서비스를 본격 시행하면서다. 지난해 9월 자율주행 로봇 기업 ‘뉴빌리티’와 손잡고 인천 송도에서 자율주행 배달 로봇 서비스를 시작한 요기요가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서울 강남에서도 도전장을 내밀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배달의민족 운영사인 우아한형제들도 곧바로 맞불을 놨다. 지난달 25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과 논현동 일대에서 자사 장보기 서비스인 ‘배민 B마트’ 로봇 배달 서비스를 전격 도입하면서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배달업계의 두 메이저 기업이 무인 로봇 배달 시장의 주도권 확보를 놓고 정면으로 맞붙은 셈이다. 배달의민족 관계자는 “강남구 역삼동과 논현동은 1인 가구 비중이 높아 배달 주문 수요가 많고 도로 정비도 양호한 편이어서 자율주행 배달 로봇 서비스에 적합한 지역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우아한형제들은 2019년 국내 최초로 건국대에서 실외 로봇 배달 서비스를 시범 운영한 데 이어 2023년엔 서울 강남구 코엑스 일대에 자율주행 음식 배달 로봇을 투입하며 로봇 배달 기술과 데이터를 꾸준히 쌓아 왔다. 이를 바탕으로 강남에 새로 투입한 배달 로봇엔 레이저 탐지 및 거리 측정 기술과 안전주행 알고리즘 등을 적용해 장애물이 많은 이면도로도 무리 없이 다닐 수 있도록 했다. 방수 등급도 갖춰 폭우가 아닌 이상 정상 배달이 가능하다. 배달 시간도 우선은 평일 오후로 정해 출퇴근과 점심시간 등 혼잡한 때를 피했다.
이용자들의 반응은 일단 긍정적이다. 사람이 배달하는 것처럼 현관문 앞까지 와서 물건을 직접 건네주지는 못하지만 배달 라이더와 직접 마주치지 않는 걸 선호하는 요즘 추세와 잘 맞는다는 평가다. 이날 로봇 배달 서비스를 이용한 임모(43)씨는 “건물 앞으로 나가 배달 물품을 수령해야 했지만 평소에도 문 앞에 두고 가달라고 요청하는 편이라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다. 로봇은 배달 수수료도 무료여서 계속 이용하게 될 것 같다”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그렇다고 자율주행 배달 로봇에 우호적인 시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예상보다 뛰어난 성능을 보이자 배달 라이더들 사이에선 “이러다 조만간 배달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언주로의 한 이면도로에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주문을 기다리던 배달 라이더 김진홍(38)씨는 “오토바이는 차도로 운행해야 해서 맞은편 건물이라도 빙 돌아가야 할 때가 많은데 배달 로봇은 인도로 이동이 가능해 훨씬 빠르게 배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주문 콜이 많은 도심은 로봇이 차지하고 사람은 배달이 뜸한 ‘유배지’만 맡게 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
김씨의 말처럼 자율주행 배달 로봇은 도로교통법상 보행자로 간주된다. 2023년 11월 발효된 지능형 로봇 개발 및 보급 촉진법에 따라 실외 이동 로봇 운행 안전인증을 받은 배달 로봇은 보행자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우려에 대해 배달업계는 “배달 로봇이 사람을 완전히 대체하는 건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도로만 달리는 자율주행 차량과 달리 배달 로봇은 소비자가 기다리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횡단보도나 골목길·이면도로 등 여러 난코스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달업계 관계자는 “도로는 물론 건물 구조도 워낙 다양해 로봇이 인간 못지않게 완벽히 배달 임무를 수행하려면 두 발로 걷는 로봇 기술이 대중화해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기술적 측면 못지않게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현재 운행 중인 배달 로봇이 카메라와 레이저로 사물을 인식하는 라이다(LiDAR) 센서 등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배달 로봇 서비스 이용자가 동의하더라도 같은 건물에 거주하는 주민과 회사원들이 반발할 가능성도 상존한다. 정부가 지난해 자율주행 배달 로봇 운행 지역을 전국 보도로 확대하고 로봇이 촬영한 영상을 인공지능(AI) 알고리즘 개발을 위해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 시민단체들이 사생활 침해 우려를 들며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AI가 최대 화두로 떠오른 시대 흐름에 발맞춰 배달 로봇 기술의 현명한 축적과 활용이 필요한 때”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행인과 차량, 애완동물과 장애물 등 다양한 돌발 상황을 극복하며 쌓인 기술이 향후 글로벌 AI 기술 경쟁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이동준 서울대 미래모빌리티기술센터장은 “자율주행 배달 로봇이 다양한 장애물을 피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은 머지않은 미래에 주류로 떠오를 휴머노이드형 로봇 등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