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경제성장률이 1% 중반대까지 떨어졌다. 경제성장률 내림세 흐름이 장기화하면서 저성장의 그림자는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 있다. 내수 부진, 경기 침체에 비상계엄 후폭풍까지 맞물리며 암울한 전망이 이어진다. 기존 주력 산업 가운데 상당수 업종이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가운데 확실한 성장동력마저 보이지 않고 있다. 사이클에 따른 부진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두드러진다. 산업구조를 재편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노력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전자신문은 현재 한국의 산업, 기술 현황을 진단하고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K테크,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신년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국내 산업, 기술 분야 리더들은 새로운 동력이 부족해 한국의 저성장이 고착화하고, 외부 위협에 타격이 클 것이라고 봤다. 한국 주요 산업의 경쟁력이 길어야 5년이라는 분석이 나온 가운데, 온디바이스 인공지능(AI)과 지능형 자율제조를 필두로 한국의 차세대 산업 육성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기술·산업 리더 “저성장 장기화...산업 혁신해야”
전자신문은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70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18일부터 24일까지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공학한림원을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는 한국 경제, 기술의 문제점과 대안을 대변할 수 있는 최적 집단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학한림원은 우리나라 공학 기술 분야 최고 권위 단체다. 한림원은 매년 상반기에 후보자 발굴 및 추천 작업으로 시작해 하반기에 4단계 프로세스의 업적 심사를 연말까지 진행, 회원을 선정한다. 주로 공학계 석학, 기술 기업의 리더 등이 포진해 있다.
이번 조사에서 공학한림원 정회원은 한국 산업 나아가 경제 곳곳에서 파열음이 나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경제의 장기 흐름을 어떻게 예측하나'라는 질문에 78.5%가 '장기 구조적 저성장'을 택했다. '침체 후 회복할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16.9%, '단기 저성장 후 회복할 것'이라고 답한 비율은 4.6%에 불과했다. 한국 경제 둔화 현상을 '일시적'이라고 보는 경제 전문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응답자의 95% 이상이 한국이 경기 침체를 피할 수 없다고 봤다.
저성장이 장기화하는 요인으로 '신성장동력 부족'을 꼽은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 '한국 경제의 장단기 침체를 예상한 이유'를 묻자 '신성장동력 확보가 미흡하다'고 답한 비율이 40.6%로 가장 높았다. 이어 '경직된 노동 시장과 투자 고용 부진'(32.8%), '중국의 주력 산업 잠식'(21.9%), '보호무역주의 강화'(4.7%)가 뒤를 이었다.
응답자의 73.4%는 한국 경제, 산업이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았다. 주력 산업의 성장동력 약화가 현실화한 가운데 이를 대체할 신산업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를 표한 것으로 보인다.
'신성장동력 확보 미흡'은 전체 40% 이상이 지목했다. 기존 주력 산업이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그 원인을 추격자를 따돌릴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지 못한 결과로 봤다. '경직된 노동 시장과 투자 고용 부진'도 거의 비슷한 비율로 선택됐다. 노동공급이 둔화하는 가운데 노동시간 축소, 노동수급 미스매치 심화 등의 구조적 변화로 산업 경쟁력이 약화하고 있다는 진단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취업자 수 증가 규모(전년 대비)는 2010~2019년엔 연평균 34만명이었으나 2025년엔 18만명까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1인당 노동시간은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과 고령층 시간제 일자리 증가 등으로 감소 추세다.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따른 주요 변수로는 '보호무역'을 가장 우려했다. '미국 신정부 출범에 따른 주요 변수'를 묻자 '관세 강화 등 보호무역'을 지목한 응답자가 58.5%에 달했다. 한국의 저성장의 원인을 묻는 질의에서 보호무역을 선택한 비율은 5%에 불과했지만 이번 질의에선 과반 이상이 향후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봤다.
'중국과의 패권다툼에 따른 영향'은 27.7%로 두 번째로 높은 응답을 기록했다. '불확실성에 따른 전략 수립 어려움'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13.8%로 집계됐다.
대 미·중 수출 의존도가 절대적인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면 트럼프 변수가 향후 산업계에 메가톤급 후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전망이 반영됐다.
한국의 12대 주력산업의 경쟁력도 들여바 봤다. 핵심산업을 △기계산업군(자동차·조선·일반기계) △소재산업군(철강·정유·석유화학·섬유) △IT산업군(가전·정보통신기기·반도체·디스플레이·이차전지) 12개로 세분화해 설문을 진행했다.
'12대 주력산업 경쟁력이 얼마나 이어질 것으로 예측하나'라는 물음에 대해 상당수가 길어야 5년 남짓이라고 전망했다. 전체 44.6%가 '3~5년 이내', 36.9%가 '3년 이내'를 선택했다. 응답자의 80% 이상이 주력 산업의 경쟁력을 5년 안팎으로 본 것이다. 이어 '5~10년 이내'(16.9%), '10년 이상'(1.5%)이 뒤를 이었다.
산업별로는 석유화학·섬유가 가장 경쟁력이 취약한 분야로 꼽혔다. '12대 주력 산업 중 현재 경쟁력이 가장 취약한 업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전체 50.8%가 '석유화학'을, 46.2%가 '섬유'를 지목했다. 해당 질문은 복수 선택이 가능하도록 설정했다.
일반기계(35.4%)는 세 번째로 높았다. 철강과 디스플레이는 각 29.2%로 집계됐다. 이어 정유(26.2%), 정보통신기기(21.5%), 이차전지(21.5%) 반도체(15.4%), 가전(13.8%) 순이었다. 자동차와 조선을 고른 응답자는 각 3.1%에 불과해 가장 낮은 응답률을 기록했다.
석유화학, 섬유, 일반기계, 철강 등은 과거 주력 산업 역할을 톡톡히 했지만 현재 위기를 겪고 있는 대표 산업이다. 글로벌 소비 침체, 중국발 공급과잉이 극심한 상황으로 돌파구를 찾기 어려운 국면이다.
석유화학의 경우 에틸렌 등 범용 제품 시장은 사실상 초토화됐다. 제품 가격이 수익을 남길 수 있는 수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수년간 이어지고 있다. 앞서 한국 경제의 장기 침체의 원인으로 지목한 신성장동력 확보 실패가 원인이다. 고부가 제품 개발, 사업 구조 전환이 더디게 진행됐고 중국, 중동의 공격적 투자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는 분석이 따른다.
재계 순위 1위부터 4위 기업이 모두 뛰어든 이차전지 사업의 경쟁력이 취약하다고 본 비율도 20%가 넘었다. 중국이 세계 2차전지 수출의 절반 이상을 독점한 가운데 공급망까지 확보한 상황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실제로 응답자들은 이들 산업의 경쟁력 소실의 배경으로 중국과의 경쟁을 짚었다. '선택한 업종의 경쟁력 소실 이유'를 묻자 52.3%가 '중국 기업과의 경쟁'을 선택했다. '신성장동력 확보 실패'라고 답한 응답은 29.2%를 기록했다. 이어 '핵심 원천 기술 확보 미흡'이 10.8%, '정부의 산업 구조 개편 대응 미흡'이 7.7%로 뒤따랐다.
한국 경제의 저성장 이유로는 '신성장 동력 확보 미흡'을 꼽은 인원이 가장 많았지만 산업별 경쟁력 약화 이유로는 '중국'을 지목한 인원이 가장 많았다.
12대 주력산업 중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반도체'와 '자동차' 분야에서 글로벌 초격차를 유지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12대 주력 산업 중 혁신을 기반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업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반도체와 자동차를 고른 비율은 각각 70.8%로 나타났다.
반도체·자동차는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출을 쌍끌이 견인하는 품목으로 올해의 호조세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반도체 부문 올해 총수출은 전년 대비 40.9% 증가한 1390억 달러로 예상된다. 올해 자동차 수출은 지난해보다 2.1% 늘어난 723억 달러로 추산된다.
이어 '조선'(49.2%), '이차전지'(47.7%)도 과반 가까이 선택을 받았다. 조선 산업은 혁신에 성공한 대표 업종으로 언급됐다. 과거 범용 선박 시장을 놓고 중국과 경쟁했지만 최근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등 고부가 시장을 겨냥, 성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군함 유지·보수·운영(MRO) 시장에서 미국 등 우방국으로부터의 러브콜을 받고 있어 당분간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차전지는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는 전망도 따랐지만 이 문항에선 경쟁력을 인정하는 비율이 훨씬 높았다. 전고체 등 차세대 2차전지 경쟁력을 고려한 결과로 풀이된다. 이 밖에 '정보통신기기'(32.3%), '디스플레이'(16.9%), '가전'(16.9%), '섬유'(1.5%)가 뒤를 이었다. '정유'와 '석유화학'을 선택한 응답자는 한 명도 없었다.
초격차 경쟁력을 확보한 분야는 대내외 경제 불확실성 속에서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위 문항에서 선택한 업종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는 질문에 대해 '초격차 경쟁력 확보'라고 답한 응답자가 58.5%로 가장 높았다. 이어 '안정적 산업 생태계 구축'이 18.5%, '세계 시장 호황'(10.8%), '우수 인재 확보'(9.2%) 순으로 나타났다. 기타의견으로 '강력한 CEO 리더십'과 '선도적 기업의 리더십과 경쟁력'이 나왔다.
한국이 새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로는 AI가 압도적 선택을 받았다. '온디바이스 인공지능(AI)'를 꼽은 응답자가 36.9%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외에 '지능형 자율제조'를 꼽은 비율이 30.8%, '전력 반도체'가 15.4%로 유의미한 비중을 기록했다. '융합형 자율주행차'라고 답한 응답자는 6.2%로 집계됐다. 기타의견으로는 건설·바이오·바이오 제조기술(대사공학, 합성생물학 기반), 수소·CCUS 등 탄소중립산업, 바이오인더스트리, 전고체 2차전지 등이 지목됐다.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연구개발(R&D)이 선행돼야한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한국 산업계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기울여야 할 노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대해 'R&D를 통한 차별화 기술 확보'라고 답한 비율이 75.4%로 가장 많았다. '과감한 사업구조 재편'을 주문한 응답자도 23.1%를 기록했다. '시장 다변화 노력'을 꼽은 응답자는 1.5%였다. ESG 경영으로 경쟁력 확보를 할 수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없었다.
전문가들은 한국 산업 생태계가 반등하려면 주력 산업 혁신과 신산업 육성이 투트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산업 경쟁력 제고에 필요한 정부 정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는 질문에 가장 높은 응답률을 기록한 답변은 '주력 산업 혁신·신산업 육성(46.2%)'으로 나타났다. 이어 '정책 일관성 및 정치 환경 안정성'(29.2%), '고용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21.5%) 순으로 나타났다. 산업 전환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본 응답은 3.1%로 매우 낮은 응답률을 기록했다.
◇결국 AI...흥망 갈림길, 승부수 던져야
한국의 신성장동력을 묻는 말에 90% 가까이가 AI 연관 산업을 지목했다.
온디바이스 AI는 사진이나 동영상의 화질을 개선하고 고품질의 콘텐츠 인식 프로세싱을 지원하는 기술이다. 클라우드로 전송할 필요 없이 에지 디바이스에서 즉시 처리하는 것이 기술의 핵심인데 이를 구현하는 게 고성능 신경망처리장치(NPU)다. 최근에는 대규모비전모델(LVM) 및 대규모언어모델(LLM)과 같은 복잡한 수준의 생성형 AI도 경량화하는 추세다.
지능형 자율제조는 AI를 기반으로 하는 제조 공정을 혁신하는 것을 말한다. 전력 반도체는 AI 확산의 최대 걸림돌로 일컬어지는 전력 다소비 문제를 해결할 열쇠로 여겨지는 기술이다.
공학한림원 회원이 AI를 신성장동력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자명하다. 한국이 AI 관련 풍부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기존 산업 경쟁력을 배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반도체 밸류체인은 오픈AI와 같은 AI 서비스 기업, 아마존웹서비스(AWS), 메타 등 인프라 기업과 후방의 메모리·파운더리 기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미국이 전방의 최종 구매자와 구매력을 보유한 시장 창출 기업을 보유했다면 한국은 후방의 '핵심 공급자'로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이 AI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상대적으로 약한 전방 수요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후방으로 연결할 글로벌 AI 반도체 팹리스를 육성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중국 반도체 시장의 약진과 미국의 전방위 압박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한국의 골든타임은 최대 3년에 불과하다고 분석한다.
실기하면 글로벌 AI 패권의 협상력은 약화하고 중국 등 후발 주자와 단순 원가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미 기존 주력산업에서 중국과의 경쟁으로 어려움을 겪은 우리 입장에선 최악의 시나리오나 다름없다.
정부의 전력과 지원이 절실한 배경이다. 자생적 AI 반도체 설계와 공급 능력은 향후 AI 시대의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자산이다. 원천기술력 확보 없이는 미래 AI산업 전체가 특정 기업이나 국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겐 지금이 선진국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할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다행히 한국은 성장시장 내 균열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파고들 수 있는 최고의 무기, 제조 생태계를 보유했다.
정윤석 리벨리온 최고전략책임자(CSO)는 “엔비디아의 독점으로 AI 서비스 기업, AI 인프라 관련 헤게모니를 확보하지 못한 중국과 중동, 동남아 지역 국가는 물론 파운드리와 메모리, 반도체 관련 하드웨어 생태계에서도 '반'엔비디아 수요가 생겨나고 있다”면서“한국이 보유한 제조 생태계와 AI반도체 기술은 가파르게 성장하는 AI시장에서 이런 잠재적 틈을 파고들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문제는 시기와 돈이다. 일본, 중국 등에서도 AI반도체 제조를 위해 천문학적 투자를 하고 있다. 한국이 격차를 벌리며 리더십을 가져가기 위한 골든타임은 3년 남짓으로 언급된다. 이 시간 내 AI반도체 팹리스 육성이 필수다.
우수한 원천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이 일정 규모의 생산력을 갖추려면 생산비와 기술력 격차를 유지하기 위한 '연구개발비'를 꾸준히 조달해야 한다.
엔비디아와 같이 실질적인 임팩트를 가져올 수 있는 팹리스를 배출하기 위해선 전략적인 선택과 더불어 과감하고 집중적인 금융지원이 꼭 필요하다는 의미다.
정 CSO는 “유의미한 국내 AI 서비스·인프라 업체와의 스케일업 경험이 필요하다”면서 “한국의 반도체 생태계를 활용한 공급력과 정치·지정학적 규제의 틈을 공략하기 위한 민관의 협력을 가속화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AI인프라 시장은 아무리 좋은 기술력이 있어도, 큰 규모의 유의미한 실적이 없으면 시장을 공략하기 어렵다”면서 “국가 AI 데이터센터 정책 활용, 국내 민간 파트너사와의 전략적 관계를 통한 대규모 스케일업 경험을 확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 CSO는 또 “한국이 이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메모리(HBM) 및 첨단 패키징 생태계와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첨단 AI 반도체 공급력과 나아가 원가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면서 “이 과정에서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술력과 상업성이 검증된 업체에게는 생산비를 쉽게 조달할 수 있는 금융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신영 기자 spicyzero@etnews.com, 최호 기자 snoo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