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와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운동은 여타의 사회운동과 구분되는 독특한 특성이 있었다. 최대 규모의 유권자 집단이면서, 존재 그 자체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할 가능성이 높았다. 카를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잃을 것은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온 세상’이라고 주장했던 이유다.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실천을 하면 세상이 좋아지는 구조를 내재하고 있었다. 다르게 표현하면, 노동자 집단은 ①진보적 가치를 내장한 + ②유권자연합이 가능한 집단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진보정치 노선은 언제나 3가지가 존재한다. 첫째, 진보적 가치는 실현하되 유권자연합에 실패하는 경우. 둘째, 유권자연합을 위해 진보적 가치에 연연하지 않는 경우. 셋째, 유권자연합도 성공하고 진보적 가치도 실현하는 경우다. 진보정치의 본질적 미션은 세 번째 노선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실제로 노동운동과 연동된 진보정치는 인류에게 두 가지 선물을 안겨준다. 하나는, 보통선거권이다. 보통선거권은 19세기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가들의 핵심 과제였다. 1846년 영국의 1차 선거법 개정을 시작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20년대에 선진국 대부분에서 보통선거권이 실현된다. 다른 하나는, 복지국가였다. 복지국가는 취업자의 다수였던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설계됐다. 그래서 명칭도 ‘사회보험’이다. 복지국가는 ‘노동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상과 실천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우리가 혜택을 보고 있는 산재보험, 고용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 노인요양보험, 기초연금 등의 사회보장제도가 만들어진 유래다.
‘복지정책 매개’ 유권자 연합
복지동맹. 복지정책을 매개로 하는 유권자연합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복지국가가 복지동맹이 작동됐기에 가능했다. 복지동맹은 정책노선과 정치노선의 결합이다.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면서 선거도 승리하는 경우다. 진보정치를 꿈꾸는 사람들이 1930년대 미국의 ‘뉴딜 연합’을 추억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복지국가’를 추억하는 이유 역시 복지동맹의 모범 사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산업화, 복지국가 달성, 세계화로 인해 선진국의 진보정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딜레마의 본질은 ①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②유권자연합을 ‘동시에’ 충족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미국 노동자와 유럽 노동자의 상당부분은 이민 반대와 세계화 반대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 민주당과 유럽의 사민당 계열은 이들의 요구에 소극적이었다. 트럼프와 유럽 극우정당은 이들의 요구를 적극 수용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진보계열 정당은 쇠퇴하고, 보수계열 정당은 부상하는 이유다.
한국 현대사는 지난 80년간 4가지 업적을 달성했다. 나라 만들기, 압축 산업화, 압축 민주화, 압축 복지국가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무상급식이 핵심 쟁점이 됐다. 복지정책이 ‘선거의 핵심 쟁점’이 된 것은 무상급식부터다. 이때부터 ‘복지정치의 주류화’가 실현된다. 민주당 계열도, 국민의힘 계열 정당도 ‘복지정책을 매개로 하는’ 유권자연합을 시도한다. 무상급식은 무당파 성향의 젊은 엄마들이 ‘진보’에 합류하게 된 계기였다. 반값 등록금을 매개로 대학생들이, 최저임금 인상 이슈를 매개로 청년들이 진보에 합류했다. 보수도 맞대응을 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박근혜 후보는 ‘기초연금 20만원을 매개로’ 노인표를 결집시켰다. 보수 버전의 복지동맹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복지동맹 1기 정부였고, 문재인 정부는 복지동맹 2기 정부였다.
대한민국은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형 복지국가’의 꼴을 갖추게 됐다. 한국 복지국가도 여느 선진국 수준에는 근접하게 됐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코로나19 위기 때 ‘K방역’의 세계적인 호평이었다. 문제는 한국형 복지국가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서 ‘복지동맹’은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애초에 복지동맹과 복지포퓰리즘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복지국가 이후 한국 진보의 갈 길은 무엇인가? 2024년 현재, 한국의 진보정치가 마주한 질문의 핵심이다. 우리는 어떻게 진보적 가치 실현과 유권자연합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가? 나는 그 해답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동맹’에 있다고 생각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동맹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매개로 하는’ 유권자연합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동맹은 정책적으로도 바람직하고, 정치적으로도 바람직하다. ①진보적 가치 실현과 ②유권자연합의 동시 달성이라는 진보정치의 미션에 부합한다.
‘K디스카운트 해소’ 유권자 연합
박정희식 경제성장은 수출, 중화학공업, 재벌이 주도한 경제체제다. 그간은 순기능이 더 컸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재벌 체제는 자회사 쪼개기 상장, 황당무계한 비율을 통한 합병, 인적분할을 활용한 자사주의 마법, 공익법인을 활용한 탈법 등으로 일반주주의 ‘재산권’을 강탈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민주당은 최근 ‘이사의 충실의무’를 강화하는 상법 개정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현행 상법은 이사의 충실의무에 대해 ‘회사를 위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회사와 총주주를 위해’로 바꾸는 내용이다. 일반주주의 재산권 강탈을 막기 위한 취지다. 정책적으로도 잘한 일이고, 정치적으로도 잘한 일이다.
정책적으로 보면, 상법 개정을 포함하되 ‘자본시장 선진화’라는 더 큰 그림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자본시장 선진화는 공정한 자본시장이 될 때 가능해진다. 한국 자본주의가 한 단계 발전하는 것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주식투자자는 2023년 기준 1400만명이다. 전체 유권자의 31% 비율이며, 2022년 대선 투표자의 41%에 달하는 유권자 집단이다. 주식투자자의 모든 주장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주주의 재산권이 강탈당하는 한국적 현실에서는 주식 투자자의 이해관계는 대체로 옳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의 투자자여 단결하라. 잃을 것은 대주주 횡포이고, 얻을 것은 코스피 5000과 자본시장 선진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