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했던 문명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2024-09-25

(49) 잉카 이야기 (2) 제국 멸망의 그날

카하마르카 전투…거대 잉카 제국이 168명 유럽인에게 대패

잉카 트레일 걸으며 유럽 침략 전 찬란했던 문명의 흔적 느껴

서기 1532년 11월 5일 현 페루 북부 카하마르크의 한 광장, 수만 명의 잉카군에게 둘러싸인 스페인 용병 168명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사람의 심장을 산 채로 도려내 인신공양한다는 등 무시무시한 소문의 미개인들이다. 그들의 황제를 만난다는 공포심 때문에 모두 간밤을 뜬눈으로 지샌 뒤다. 싸움이 아닌 접견의 자리였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변할지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용병 대장 프란시스코 피사로 또한 초긴장 상태이긴 했지만 마상에 앉아 냉정하게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수십 명 호위 무사들에게 둘러싸인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는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주변을 가득 메운 잉카군에게도 긴장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형제간 왕위 다툼 내전에서 얼마 전 큰 승리를 거두고 새롭게 즉위한 황제의 군대인 것이다. 처음 보는 괴상한 동물 위에 올라타고 이상한 복장들을 했지만 한 줌 200명도 안 되는 이방인들이 대제국 황제의 대군 앞에서 뭔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통역을 앞세운 선교사 발베르데가 대표로 황제 앞으로 나아갔다. 신대륙에서 원주민을 만나면 무조건 낭독해줘야 하는 스페인 왕의 교지를 의무적으로, 기계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이 땅의 지배권은 스페인 왕에 있다. 당신들은 그에 따라야 한다. 이 땅의 유일신은 하느님이시다. 당신들은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

잉카로선 황당무계할 이런 내용을 듣고 과연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발베르데의 심장은 두려움으로 터질 듯했다. 뒤에 도열한 168인의 용병들 모두 같은 심정으로 초긴장 상태였다.

통역의 말을 듣고 격노할 줄 알았던 황제는 의외로 덤덤하게 ‘그건 누가 한 말이냐’고 물어왔다. 벨베르데는 손에 들고 있던 성경책을 황제에게 건네며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성경 안에 말씀이 들어 있다.”

인디오 통역의 말을 들은 황제는 여태껏 책이라는 물건을 본 적이 없는지라 심드렁하게 성경을 받아 들고 귀에 대보거나 만지작거리다가 성가신 듯 발아래로 휙 던져 버린다.

이를 황제의 격노 표시이자 자신들에 대한 공격 신호탄으로 잘못 판단한 벨베르데는 순간적으로 뒤돌아 도망치며 발작하듯 소리질렀다.

“이놈들을 죽여라! 하느님을 거부했다.”

바로 그 순간 대포와 총소리가 광장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62기의 기마병과 106명의 보병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황제와 잉카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치밀한 작전이 아닌, 극도의 공포와 초긴장 속에서 반사적으로 취해진 집단행동이었다. 엄청난 굉음과 뜻하지 않은 공격에 정신줄을 놓은 잉카군들은 혼비백산 흩어졌다.

인류사에 큰 획을 긋는 대사건 ‘카하마르카 전투’는 이렇듯 우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날 한나절의 전투로 잉카군 7천여 명이 집단 살육됐지만 스페인 군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는 이날 인질로 생포되어 갇혔다가 이듬해 처형되었다. 거대 제국 잉카가 이렇듯 168명이라는 소수 유럽인들에게 꼼짝없이 당한 원인을 문화인류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로 보았다.

유럽인들이 무의식적으로 퍼트린 천연두 ‘균’ 때문에 전임 잉카 황제가 죽은 것이 카하마르크에서의 두 세력 조우라는 우연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까지도 잉카인들은 ‘총’과 ‘쇠’ 그리고 ‘말’이라곤 본 적이 없었다. 대포 등 철제 무기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유럽인들에게 투석기나 돌창 또는 청동 무기류가 고작이었던 잉카군은 숫자에 관계없이 오합지졸에 불과했을 뿐이다.

중남미를 통틀어 수천만 명에 이르던 잉카인들은 무자비한 유럽인들에게 짐승처럼 사육되고 오랜 세월 찬란했던 잉카 문명은 문자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급속도로 소멸돼 갔다. 잉카의 영토는 지금의 에콰도르 수도인 키토에서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일부 그리고 칠레 수도 산티아고까지 방대했다. 콜럼버스가 발을 들여놓기 전까진 아메리카 대륙 통틀어 가장 우수한 문명을 가진 대제국이었다.

드넓은 잉카제국의 거점들은 수만 킬로미터에 걸친 잉카 로드(Inca Road)를 통하여 하나의 길로 이어졌고 ‘사라진 공중 도시’ 마추픽추로 향하는 잉카 트레일은 그중의 일부 구간이었다. 제국의 시대엔 온갖 물자와 정보가 유통했던 평화와 번영의 길이었지만 제국 멸망 후의 잉카 트레일은 탐욕스런 유럽인들을 피해야 했던 인디오들에겐 숨어다니기 좋은 산악 은둔길 역할을 해줬다.

우리가 지난 사흘간 걸었던 잉카 트레일은 비록 허망하게 멸망하긴 했어도 잉카인들의 문명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실감나게 확인시켜주는 현장이었다. 3박 4일 여정의 마지막 날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부산하게 챙기고 5시에 텐트를 나섰다. 위나이와이나 캠프 바로 밑에 있는 세 번째 체크포스트에선 다른 여러 팀들이 뒤섞여 긴 줄을 이루고 있다. 1시간을 기다린 후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첫날 헤어졌던 우루밤바 강의 황토색 물길이 멀리 다시 자태를 드러낸다. 계곡을 누비며 실뱀처럼 꾸불꾸불 길게 이어졌고, 낮게 깔린 아침 구름 몇 점이 듬성듬성 강 위를 엷게 덮어가고 있다.

체크포스트를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급격한 오르막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길진 않지만 45도 경사진 돌계단이다. 두 손을 짚어가며 엉금엉금 기어오르는 모습들, 모두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한 계단에 발을 디디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익숙한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동안 사진으로 너무도 많이, 심지어 꿈속에서도 만났던 마추픽추의 모습이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현장감이란 너무도 낯설고 비현실적이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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