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0년 전의 SF(공상과학) 소설들이 지금의 새로운 문화나 정책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 걸로 압니다. 그(작가)들이 먼저 상상하고, 오랜 시간 숙고했기 때문이죠.”
세계적인 미디어아트 작가 김아영(46)에게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위기를 극복하는 데 예술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지난 27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난 그는 “메타버스라는 개념은 이미 소설에서 사용하던 용어”였다며 “소설가들이 예술가이면서, 선지자의 역할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메타버스는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현실화됐지만, 1992년 미국 작가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 크래시’에서 처음 쓰인 개념이다.
김아영은 인공지능(AI) 등 최신기술을 활용해 사회 문제를 감각적으로 다뤘다. 그는 2023년 세계적인 미디어아트상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의 최고상인 골든 니카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상을 수여한 아르스 일렉트로니카는 오스트리아에 위치한 예술·기술 융합기관으로 세계 최대 미디어아트 플랫폼이다. 김아영과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의 게어프리트 슈토커 예술감독(61)은 28~30일 서울에서 열리는 제10회 문화예술세계총회 참석 차 한국을 찾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비롯한 세계 80여개국의 예술위원회·문화기관이 참석하는 이번 총회의 주제는 ‘다중위기 시대에 예술·기술 융합분야 아티스트와 플랫폼 기관의 역할’이다. 김아영의 작품 세계,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의 설립 목적과도 들어 맞는다.
김아영과 함께 인터뷰에 응한 슈토커 감독은 “예술이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쓸모 없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는 있다”며 “예술이 현대 사회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영감과 상상력의 공간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은 전혀 다른 대안과 가능성을 보여준다”며 “혁신적인 생각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그 상상력은 공학자나 엔지니어에게 (문제 해결을 위한) 책임감있는 접근을 할 토대가 된다”고도 말했다.
김아영은 “AI를 비롯한 기술은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도,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 부분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면서도 “저는 데이터 사용의 위험성을 건드리기엔 부족하지만, 기술이 바꾸고 있는 우리의 삶을 바꾸고 있는지를 작품에 담고 있다”고 말했다. 김아영의 ‘딜리버리 댄서’ 연작은 AI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한 화려한 영상으로 코로나19 팬데믹 후 일상화된 배달 노동자를 다뤘다는 데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슈토커 감독은 “김아영이 젊은 배달 기사들의 얘기를 통해 많은 감동을 줬다”며 “사실만 전달한다고 사람들이 감동을 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우리 인간의 이야기를 만들고 전달해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술은 첨단 기술이 촉발한 사회 문제를 비추는 창이면서도, 첨단 기술의 위협을 받고 있기도 하다. AI가 미술이나 음악을 학습한 뒤, 스스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 예술가들이 위기에 직면했다는 우려도 있다. AI가 기존 예술 작품을 학습한 뒤 새로운 작품을 내놓으면서, AI 회사와 원작자 간의 지식재산권 다툼이 발생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슈토커 감독은 “AI 가동 서버를 가진 대기업들이 향후 지식재산권을 주장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10~15년 사이에 이런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정치·경제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이번 총회에서 이뤄진 여러 관련 논의와 토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아영은 “지식재산권 문제가 앞으로 중대할 것 같다”면서도 “AI는 사람과 달리 의도를 갖지 않기 때문에, 작품 제작이 반복되면 일정한 패턴의 결과를 내게 되고 (관객의) 흥미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올해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심사위원으로도 참여했던 그는 다양한 기술의 예술 작품을 봤다면서도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이기 보다는, 작품에 의미와 의도를 부여하는 아티스트의 사유의 깊이”라며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사유가 깊지 않으면 작품의 깊이도 빈약해진다는, 예술의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다”고 말했다.
홍콩 엠플러스,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등에서의 전시를 앞둔 김아영은 “당분간은 딜리버리 댄서 연작의 새 작품을 공개할 것”이라며 “딜리버리 댄서 연작과는 거리가 있는, 올해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 선보였던 중동 관련 작품과도 다른 에피소드의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