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지나도 새해가 시작된 것 같지 않다.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내란동조 세력들은 여전히 버티고 있고, 서울서부지법에서는 끔찍한 폭동이 자행됐다. 윤석열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계엄 정국이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상식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하지만 계엄 세력과 싸운다고 해서 세상의 시계는 멈춰주지 않기에, 시민들의 일상을 위협하는 무수한 일들이 소리소문 없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23일, 대법원은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3000가구에 달하는 피해를 낳은 전세사기범 남모씨 등에 대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1심에서 남씨는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공인중개사 등 공범들 역시 4~13년의 실형을 받았다. 그러나 2심에서 형량이 절반 이상 줄어 남씨는 징역 7년, 공범들 역시 무죄나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됐다. 피해자가 수천명에 이르고 그중 4명의 목숨까지 앗아간 범죄에 대한 판결치고는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다. 전세사기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러나 사회의 관심이 내란 정국으로 쏠린 사이, 사기 공범들이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는 이 엄청난 사안은 제대로 된 조명조차 받지 못하고 흘러갔다.
한편, 혼란한 시기를 틈타 누군가는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 최근 “탄핵 정국으로 인해 임대차법 개정이 어려워졌다”는 기사가 사전에 모의라도 한 듯 연이어 보도되었다. 그러나 따져보면 윤석열 정부는 애초부터 임대차법 개정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인 적이 없다. 임기 초반 잠깐 논의된 것을 제외하면, 대통령실도 국토교통부도 법 개정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나 근거 자료조차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핵 정국을 임대차법 개정 무산의 원인으로 둔갑시키려는 보도 행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이는 2020년 임대차법 첫 개정 당시, 마치 한국 경제가 2년 뒤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의 몸과 정신 모두 제한적이기에, 너무나 큰 사안에 휩쓸린 나머지 일상이 파괴되는 안타까운 소식을 놓치기 쉬운 상황에 놓여 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불평등과 차별을 강화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위협하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주거권만이 아니다. 설 연휴에도 이주노동자가 안전관리 미흡으로 일터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피해자가 ‘n번방’의 3배가 넘는 텔레그램 디지털 성폭력 사건이 새롭게 드러났다.
부패한 정치 세력 하나를 몰아낸다고 세상이 갑자기 나아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광장에 나서는 이유는 단순한 정권교체에 있지 않다. 형형색색의 응원봉과 다채로운 깃발에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시민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말해지지 않은 다양한 시민의 목소리를 나누고, 희망적인 상상을 펼치는 힘을 잃지 않으면서도, 오늘 이 시간에 꼭 필요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