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징으로 / Getting to Nanjing
난징이 중국의 전부도 아니고 우리 고향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은 곳이고 내가 대학을 다니려던 곳이었다. 중국 땅에 발을 딛자마자 그곳에 가고 싶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첫 방문은 각별히 인상 깊은 여행이었다. 그 여행의 또 하나 특별한 점은 아버지와 단둘이 지내며 근대 중국에 관해, 그리고 문학과 유가사상 아닌 다른 주제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처음이자 유일한 기회였다는 것이다. 그분이 데려다주신 여러 곳에서 일어난 많은 의문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그 후 오래도록 겪는 일과 읽는 글에서 그분과 함께 난징에서 지낸 나흘의 시간을 기억으로부터 되살려내곤 했다.
상하이 도착 후 아버지는 고종사촌의 결혼식 참석을 피하려고 나를 데리고 난징에 가셨다. 기차로 얼마 안 걸렸다. 아버지는 영어 교사로 초빙받은 학교에 들렀다. 아버지의 모교인 동남대학, 지금은 국립중앙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학교의 부설 중학교였다. 내가 들어가고 싶은 학교이기도 한 중앙대학은 1937년 일본군에게 쫓겨가는 국민당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옮겨갔었다. 8년이 지난 이제 청셴제(成贤街)의 옛 캠퍼스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학교가 훨씬 커져서 딩쟈차오(丁家橋)에 의학부가 있고 신입생들은 첫해를 그곳에서 지낸다고 했다.
아버지가 입학원서를 내두었고,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내가 알아보라고 하셨다. 외국 학교에 다닌 내게 입학시험이 쉽지 않을 것을 아버지는 아셨다. 정규학교 다닌 기간이 짧고 앤더슨학교의 과학 수업이 빈약해서 과학 논술이 제일 걱정이었다. 영어로 공부했기 때문에 중국어 용어도 잘 몰랐다. 영어가 가장 중요한 외국어학과에 원서를 넣으셨다. 영어만 잘하면 다른 과목은 낙제만 면해도 합격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이셨다. 중국어 논술을 제일 걱정하셨다. 중앙대학은 고전한문을 중시하는 것으로 이름난 학교여서 그곳의 높은 기준에는 내가 맞추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난징 사람들은 8년간 일본 지배가 끝난 후의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바빴다. 중앙정부 기관들이 충칭에서 돌아왔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경제 앞에 모두들 생계비 마련에 부심하고 있었다. 두 거대정당이 연립정부에 합의하지 못하는 상황을 많은 사람이 아쉬워하고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모두들 평화를 바라는데도 인민해방군은 소련군의 방조 아래 만주 중부로 진격했고 국민당정부는 그 격퇴를 다짐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1년이 안 된 시점에서 이 내전이 불가피하게 보인 까닭을 아버지가 설명해 주셨다. 그것을 알면서도 귀국하신 것은 국민당정부의 승리를 믿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방의 전투가 치열해졌다. 농촌에서 인기 있는 인민해방군이 예상보다 훨씬 강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전에 난징 오신 지 20년이 넘었다. 도시가 많이 변해 있었다. 민간의 분위기에 긴장하는 기색이셨고 국민당정부의 상황에 관해 무슨 말씀을 내게 해주실지 판단이 잘 안 되시는 것 같았다. 그래도 중국 정치에 대한 침묵을 깨트리기는 하셨다.
필요한 업무를 처리한 후 나를 쑨원 묘소로 데려가셨다. 아버지가 중국을 떠난 후 지어진 곳이어서 아버지도 처음이었다. 해외에 계시는 동안 중국이 새로운 전망을 열어나가는 단초를 마련해준 혁명에 나를 접속시켜 주는 데도 열심이셨다. 1912년 초에 난징을 임시 수도로 삼고 그곳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긴 쑨원 이야기를 해주면서 1928년 이후 국민당정부의 좋았던 몇 해 시절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해외 출생의 아들에게 이해시키려 애쓰셨다. 1911년 혁명에 관해서는 나도 들은 것이 적지 않았다. 10월 10일의 우창 봉기가 내 생일 바로 다음날이었다고 이포 친구들에게 자랑하던 생각이 묘소 계단 아래 섰을 때 났다.
묘소로 올라가는 자금산(紫禁山) 기슭은 가팔랐다. 아버지는 쑨원의 묘소에 제대로 경의를 표하는 자세를 가르쳐주셨다. 장제스의 국민당정부가 들어선 이태 후에 태어난 내 이름 “Gungwu”는 그 정부 문교부가 채택한 로마자표기법에 따른 것이었음을 올라가는 길의 엄숙한 마음속에 떠올렸다. “Kengwu”나 “Gengwu”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역주: “Kengwu”는 저자의 이름을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으로 적은 것이고 “Gengwu”는 지금 널리 쓰이는 핀인(拼音, Pinyin) 표기법으로 적은 것이다. 한자의 로마자 표기법은 16세기 말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시작한 과제였으나 서양인들의 관심사에 그치고 있다가 19세기 말부터 중국인들도 관심을 키우게 되었다. 1867년에 영국 외교관 토머스 웨이드가 고안한 표기법이 1892년 다른 영국 외교관 허버트 자일스의 중-영사전에 사용된 후 널리 통용되다가 1958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반포한 핀인 표기법이 보편화되었다. 타이완에서는 2009년에 핀인 표기법을 채택했다.]
난징은 중국의 정치적 수도에 그치지 않고 유구한 중화문명의 ‘근대적’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아버지는 가르쳐주시기 시작했다. 묘소 앞에 서서 아버지는 통일 중국을 향한 쑨원의 꿈이 마침내 이뤄지고 있다는 느낌을 내게 불어넣어 주셨다. 그 꿈이 내 인생에서 언제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그 순간부터 알아차렸다.
이 생각 때문에 공부의 목적을 더 심각하게 느꼈다. 계획대로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데, 합격을 위한 내 최강의 조건이 영어 능력이라서 전공의 선택 범위가 제한되었다. 아버지가 권하는 문학 공부를 나도 원했고 이 제한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아주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내 외국어 능력을 나라를 위해 더 잘 활용할 길이 있을 것이라고 그분은 생각하셨다.
묘소 다녀오는 길에 아버지가 해주신 현대사 이야기는 전에 별로 듣지 못한 것이었다. 묘소 앞에 서서 아버지가 보시는 대로의 역사 이야기를 듣다 보니 모든 것이 자리가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쑨원이 바라던 대로 난징이 다시 신중국의 수도가 되어 있는 이 현실 속에 우리 자신도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의 일부였다.
그날의 어떤 일도 몇 달 후부터 겪게 될 새로운 상황을 예고해 주지 않았다. 아버지 말씀이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있는 동안에 그분이 그린 그림의 색깔이 변해갔다. 밝은색에서 어두운색으로. 몇 달 학생으로 지내며 친구들과 함께 난징 곳곳을 둘러보는 동안 부패하고 해이한 정부가 눈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튿날 난징 시내를 걸으며 아버지는 1911년 혁명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그분 보시기에 그 혁명은 물려받은 유산을 재평가하고 새로운 사상과 제도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지식에 마음을 열어 선진 서양을 따라잡을 기회를 중국인에게 열어주었다.
쉬운 길은 아니고, 진행 중인 내전에 중국의 미래가 걸려있었다. 천명을 얻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 만큼은 나도 중국 역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진영이 혁명의 이름 아래 권력의 획득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Revolution”의 번역어로 쓰이고 있는 “혁명(革命)”의 원래 뜻이다.
이포의 많은 건물에 걸려있는 쑨원의 사진에 붙이는 그의 유명한 말씀을 아버지가 일깨워주셨다.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으니 동지들은 계속 분투하시라.(革命尚未成功,同志仍须努力)” 말라야에 있을 때는 내가 중국현대사의 이 부분에 자극받지 않기를 아버지가 원하셨다.
중국 귀환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주시면서 이 ‘혁명’과 말라야 독립전쟁을 제창하는 말라야공산당(MCP) 사이의 차이를 말씀하셨다. MCP는 난징 국민당정부에 대항하는 중국공산당(CCP)을 모델로 삼았다. 이제 돌아보면 내 이해가 참 얕았다. 아버지가 쑨원 이야기를 해주신 몇 달 후 내 마음에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1912년 혁명이 과연 성공한 것이었는지, 이제 중국공산당을 통해 혁명의 진짜 성공 가능성이 커진 것은 아닌지. 그 당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중국 인민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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